제 목 : 주식자랑과 배아픔에 대한 생각(펌)

요즘 딴지 게시판에 주식 이야기가 부쩍 많아졌습니다. 이유가 없지는 않습니다. 지난해 이재명 대통령 취임 이후 상법 개정을 통해 주주 이익 보호에 대한 기대가 커졌고, 한국 자본시장이 조금은 더 투명하고 공정한 방향으로 가는 것 아니냐는 분위기도 생겼습니다. 여기에 AI 반도체 붐까지 겹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한국 증시가 크게 올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침 여유자금이 있었거나, 좋은 종목을 들고 있었거나, 오랫동안 참고 버틴 사람들이 뜻밖의 큰 수익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그렇게 돈을 벌면, 자랑하고 싶어집니다. 이건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사람은 돈을 벌면 단순히 계좌 잔고가 늘었다고만 느끼지 않습니다. 내 판단이 맞았고, 내가 세상을 제대로 읽었고, 나는 뒤처지지 않았다는 확인을 받습니다. 특히 주식 수익은 노동소득과 달리 약간의 영웅담 구조가 있습니다. 내가 남들이 망설일 때 과감하게 샀고, 버텼고, 맞혔고, 보상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주식 수익 자랑은 돈 자랑이면서 동시에 판단력 자랑, 용기 자랑, 시대를 읽은 감각 자랑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익명 게시판에 와서 하느냐. 이게 핵심입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돈 자랑이 생각보다 위험하거든요. 가족에게 하면 돈 빌려달라는 말이 나올 수 있고, 친구에게 하면 관계가 미묘해질 수 있고, 직장 동료에게 하면 시기와 소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배우자에게도 마음껏 자랑하기 어렵습니다. 

 

익명 게시판은 그 모든 비용을 낮춰줍니다. 박수는 받고 싶지만 책임은 지고 싶지 않을 때, 익명성은 매우 편리한 무대가 됩니다. 여기에 정치적 감정도 덧칠됩니다. 그냥 삼성전자 하이닉스 올라서 돈 벌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믿었던 정치적 방향이 자본시장 정상화로 이어졌고 그 결과 내 계좌도 보상받았다는 식으로 해석되면, 수익은 개인의 운이 아니라 진영의 승리처럼 느껴집니다. 이 경우 자랑은 개인적 허영만이 아니라 축제의 언어가 됩니다.

 

“우리 편이 이겼고, 내 계좌도 이겼다.”

 

이건 꽤 강력한 심리적 결합입니다. 하지만 듣는 사람들의 불편함도 똑같이 자연스럽습니다. 주식시장은 같은 시대를 살아도 모두가 같은 버스를 타는 곳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현금이 없어서 못 샀고, 어떤 사람은 겁이 나서 못 샀고, 어떤 사람은 더 급한 생활비 때문에 투자할 수 없었고, 어떤 사람은 샀지만 종목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수익 자랑은 누군가에게는 축제가 아니라 뒤늦게 받은 결석 통지서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말한 사람은 그런 뜻이 아니어도, 듣는 사람에게는 나는 왜 그 버스를 못 탔을까 하는 마음을 건드립니다.

 

이건 단순한 질투만은 아닙니다. 사회심리학적으로 보면 사람은 절대적 빈곤보다 상대적 박탈감에 더 민감합니다. 내 삶이 어제보다 나빠지지 않았어도, 옆 사람이 갑자기 몇 억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으면 내 자리는 갑자기 초라해집니다. 특히 같은 정치 커뮤니티, 같은 정서 공동체라고 느꼈던 공간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불편함은 더 커집니다. 같이 분노하고 같이 응원하던 공간이 어느 순간 계좌 인증과 수익률 자랑의 장이 된 것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쪽 반응이 다 자연스럽습니다. 돈 번 사람이 기뻐하고, 그 기쁨을 어디엔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현실에서는 하기 어려운 돈 이야기를, 익명 게시판에서는 조금 더 쉽게 털어놓을 수 있으니까요. 반대로 그걸 보는 사람이 불편한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남의 수익 이야기는 단순히 남의 기쁨으로만 들리지 않습니다. 때로는 내가 놓친 기회, 내가 갖지 못한 여유, 내가 놓친 버스를 떠올리게 합니다. 결국 이 논쟁의 본질은 돈 자랑 자체라기보다, 같은 말을 서로 다른 마음이 다르게 번역하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말하는 사람에게는 축제의 언어입니다. 내 판단이 맞았고, 좋은 시절이 왔고, 나도 그 흐름에 올라탔다는 말입니다. 듣는 사람에게는 비교의 언어로 들릴 수 있습니다. 나는 탔고 너는 못 탔다는 말처럼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논쟁에는 깔끔한 악역이 없는것 같습니다. 자랑하는 사람이 꼭 자존감이 낮거나 천박해서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불편해하는 사람이 꼭 속이 좁아서 불편한 것도 아닙니다. 한쪽은 기쁨을 말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그 말을 상실감으로 듣고 있을 뿐입니다. 돈 이야기는 언제나 돈보다 더 많은 것을 건드립니다. 판단력, 자존감, 노후 불안, 상대적 박탈감, 그리고 내가 이 시대의 흐름에서 어디쯤 서 있는가 하는 감각까지 건드립니다. 그래서 게시판의 돈 자랑 논쟁은 단순한 예절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개인적으로는 느닷없이 찾아온 강세장이 만들어낸 새로운 감정의 풍경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을 번 사람의 기쁨, 못 탄 사람의 박탈감, 같은 편 안에서도 갈라지는 미묘한 거리감, 그리고 시장의 성과가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의 문제입니다. 같은 정치적 기대를 공유했고, 같은 시장의 정상화를 바랐지만, 그 결과가 모두에게 같은 방식으로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누군가는 수익률로 변화를 체감하고, 누군가는 남의 수익 인증을 보며 자신이 그 변화의 바깥에 서 있는 듯한 감각을 느낍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단순한 돈 자랑 논쟁이 아니라, 좋아진 시장이 만들어낸 새로운 감정의 과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장이 좋아질수록 누군가는 더 많은 기회를 얻고, 누군가는 그 기회를 놓쳤다는 감각을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제도가 나아지고 시장이 정상화되는 것과 별개로, 그 성과가 사람들에게 불균등하게 도착할 때 생기는 기쁨과 박탈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결국 뜨거운 시장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이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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