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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의 경우 소설 속 배경이,
중국인들의 실생활과 사회적 경제적 변화를 중심으로 펼쳐질 뿐더러,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내수용 컨텐츠다보니,
뉴스매체를 통해 '가공'된 정보로 파악되는 중국과는 전혀 다른
'날 것의 현실'을 알게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ㅎ
정리해 보자면 이런 거죠.
1. 자본주의 경제체제(1978년)
아직도 많은 이들이 중국을 냉전시절 공산주의 국가로 착각하고 있지만,
연대물을 단 하나만 읽게 되더라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과거로 회귀한 주인공의 사고방식이나 행동,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선택하는 방법이
그야말로 자본주의의 화신과 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거든요.
그리고 이 후 면면부절 이어지는 주인공의 상업활동 여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중국이 경제체제를 자본주의로 바꾼 지
무려 48년이나 지난 국가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중국이 자본주의로 노선을 변경하게 된 이유는
이 전 10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의 참상 때문이었죠.
2. 문화대혁명 (1966~1976)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연대물을 읽다보면,
정책적으로 다수를 고용한 생산활동이나,
상업적 이윤활동을 죄악시 하여
전국민이 만성적인 물자부족과 가난에 신음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를 보면,
지식인들을 탄압하며 문화, 과학, 기술, 산업, 경제 모두를 초토화시킨
그 시절의 광기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죠.
3. 문화대혁명의 끝(1976)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10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은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82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큰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본래 마오쩌둥은 '화궈평'이란 인물을 후계자로 지명했는데,
이 화궈평은 자신의 안정적 권력 유지를 위해,
곧바로 문화대혁명의 주도 세력이었던 마오쩌둥의 아내를 위시한 '4인방'을
긴급 체포합니다.
화궈평은 본래 마오쩌둥의 노선을 적당히 유지하려 했으나,
문화대혁명의 10년동안 전국적인 기아와 더불어,
초토화된 경제의 끔찍한 현실을 목도한 당내 대다수 인사들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문화대혁명 시기 두 번이나 숙청을 당했던 실용주의의 화신,
덩샤오핑(등소평)의 복귀를 강력히 요구하죠.
그렇게 1977년 덩샤오핑이 정계에 복귀하게 되었고,
이 후 당 내 투표와 권력투쟁을 통해 자연스럽게 화궈평은 밀려나게 됩니다.
4. 자본주의와 개혁 개방의 시작 (1978~)
1978년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로 등극하자마자,
덩샤오핑은 실사구시를 앞세우며 서방에 개혁개방의 문호를 활짝 열었고
민간의 상업활동을 허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1983년까지는 체제변경의 과도기라
문화대혁명에 절여진 이들의 난장이 남아 있던 때였고
상업활동의 선두에 섰던 기업가들이 감옥에 갇히기도 했죠.
그러나 1984년 이후 모두 풀려나며
이 후 무수한 천만장자 억만장자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5. 사유재산의 강화 - 가정연산도급 책임제 (1978~)
1978년 즈음의 소설에선 꼭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가정연산도급책임제'가 바로 그것이죠.
문화대혁명 기간동안 중국의 농촌은 '인민공사'라는 거대한 집단농장 체제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열심히 일해도 남과 똑같이 배급을 받으니,
아무도 열심히 일하지 않았고 끔찍한 대기근이 찾아왔죠.
그런데 대단히 역사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1978년 11월 밤. 극심한 가뭄과 기아에 시달리던,
안후이성 평양현의 '샤오강촌'이라는 작은 마을의 농민 18명이
비밀리에 모여 호롱불 밑에서 비밀 서약을 맺은 것입니다.
"마을의 토지를 각 농가별로 몰래 쪼개어 농사를 짓자.
국가에 바쳐야 할 할당량만 채우면, 나머지 수확물은 각자가 갖는다.
만약 이 일로 마을 간부가 감옥에 가거나 사형을 당하면
남은 사람들이 그 자녀를 18살까지 책임지고 키워준다."
다음해 봄이 되고 가을 추수기가 시작되었을 때,
1979년 한 해의 수확량이 지난 10년치 수확량을 합친 것보다 많았습니다.
당시 안후이성 당서기였던 완리는 이 제도를 몰래 묵인하며 장려하였고,
1980년 5월, 덩샤오핑은 공개적으로 샤오강촌의 방식을 칭찬합니다.
처음엔 빈곤하고 외진 지역에 한하여 토지 도급제를 허용한다는 지침을 내렸으나,
한 번 풀린 족쇄는 겉잡을 수가 없었죠.
도급제를 도입한 마을마다 생산량이 수백 퍼센트씩 폭등했고,
반대로 집단농장 체제를 유지하는 곳은 계속 굶주리자,
결국 1982년 1월,
공식적으로 당 차원에서
'가정연산도급책임제'를 인정하고 전국적으로 확대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전국의 모든 토지가 개별 농가에게 나누어져 관리되기 시작하죠.
바로 이 시점부터 중국에선,
개인이 토지에 대한 사실상의 소유권(정확히는 토지사용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
6. 회귀자들의 베이징 노른자위 부동산 투자법(1978~)
1978년 즈음의 과거로 회귀한 소설 속 주인공들이
꼭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베이징 한복판의 사합원을 헐값에 무더기로 구매하는 것입니다.
베이징 시내의 노른자위 사합원을 단돈 몇천 위안에 쓸어 담는데,
이러한 가옥들은 현재 가치가 수백억원에 달하는
초고가의 주택이란 특징이 있습니다.
주인공들이 이렇게 개인 소유의 저택을 쉽게 구매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문화대혁명의 여파가 숨어 있습니다.
1978년 덩샤오핑이 집권한 후,
빼앗았던 사유재산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정책을 대대적으로 시행하지만,
당시 집을 돌려받은 원래 주인들 상당수가
문화대혁명에 끔찍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고
언제 다시 돌변해서 내 재산을 빼앗고 자본가로 몰아 죽일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차 있었죠.
그래서 집을 헐값에 팔아 치우고
현금을 챙겨 홍콩이나 미국 등 해외로 도망치듯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주인공이 이 시기에 베이징의 전통가옥(사합원)을 구매하는 내용이
소설 속에 흔히 등장하죠.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구매 자체를 하기가 극도로 어려워지니까요.
이 때는 개혁개방 초기라 관련 법이 없어서,
그냥 개인 간의 사적 계약서로 진행된 회색지대의 음성적인 거래였습니다.
이 후 1990년대에 부동산 등기 제도가 정비될 때,
이 때 써둔 사적 계약서를 들고 가면,
정식 소유권으로 인정해 주는 방식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7. 친미 친서방, 극도의 사대주의 (1978~2010)
냉전시절에 기억이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중국인들이 반미, 반서방 마인드를 가지고 있을 거라 착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연대물을 읽어보면 완전히 정반대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려 1978년 부터 2010년까지 엄청 긴 시간동안,
중국 사람들 절대 다수는
대부분 친서방 사대주의에 강하게 함몰되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죠.
그 원인은,
문화대혁명 시기에 과학 기술 학문, 문화 모두가
주변국들에 비해 수백년에 가까운 격차가 벌어지면서
경제적 문화적으로 극빈한 후진국이 되어버린게 원인이었습니다.
이로인해
민족적 자부심이나 자긍심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어졌으며,
지식인들은 모두 다 해외로 빠져 나가면 돌아오지 않았고,
추후 쫓기듯 자국으로 돌아온 지식인들조차
서양의 문물을 우월하게 여기고 자국을 낮잡아 보는
사대주의에 깊숙히 빠진 상황이었습니다.
나라 전체가,
서양에 대해 엄청난 동경과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시기라서
그 동안 중국에 방문한 서양인들은
신분에 상관없이, '초국민대우'를 받았죠.
국가적 지역적 차원에서,
외국인 방문객을 어떻게 극진히 대접해야 할까를 고민하며
세금감면, 규제면제, 전용숙소 등 각종 우대정책과 접대를 진행했습니다.
대학마다 각종 혜택을 제시하며
단독기숙사나 국빈관 등 다양한 조건을 내걸어
외국인 유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애를 썼고,
이러한 유학생들이 가져오는 바깥 세상의 물건에 큰 부러움과 관심을 가지죠.
이러한 분위기는 선진국과의 기술 격차가 점차 줄어들고,
중국 내에 세계적인 기업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201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합니다.
이 후엔 국수주의(애국주의)가 강조되며,
오히려 뒤늦은 반서방, 애국소비 열풍이 불기 시작하죠.
8. 엄청난 파급력의 한류(1997~2015)
이어 90년대 말 즈음에 이르면,
소설 속에서 신기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한국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타나기 시작하죠.
그 까닭은 그즈음부터 한류가,
중국 내에서 단순한 외국 문화가 아니라
전국적인 하나의 문화 현상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사실 1980년대 중국이 개혁개방을 막 시작했을 때만 해도
중국 내에서는 홍콩 일본 등의 문화적 영향력이 컸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점차 내수에만 집착해
각종 컨텐츠의 수출 절차를 불편하게 만들고, 가격을 올리면서
갈라파고스화 된 반면,
IMF 직후였던 한국은 국가 차원에서 문화 수출을 장려하면서
드라마 판권을 중국에 헐값에 넘기거나 무료로 끼워팔기를 했습니다.
당시 컨텐츠가 부족하던 중국에선
이러한 한국 컨텐츠들을 저렴하게 사와서 방영하기 시작했죠.
중국 내 한류 드라마 폭발의 시작은,
1997년 중국 중앙방송(CCTV)에 방영된 '사랑의 뭐길래'였습니다.
당시 중국 주말 거리를 텅텅 비게 만들 정도로 히트를 쳤습니다.
당시의 중국은,
여전히 전통적인 가족 관념과 보수적인 사회분위기가 강했는데
한국의 드라마는 어른에 대한 공경,
고부갈등, 가족애등을 깔고 있어 중국 대중들이 공감하기가 쉬웠죠.
이로인해 중국의 황금시간대 TV를 한국 드라마가 장악하게 됩니다.
이 시절의 중국 여학생들은
한국 연예인의 헤어스타일과 한국 패션을 따라 하고
H.O.T. 포스터가 붙은 방에서 아이리버 MP3를 들었고,
남학생들은 한국 온라인 게임인 미르의전설이나 뮤온라인,
크로스파이어 등을 하며 청춘을 보내죠.
특히 미르의 전설2는 중국명칭이 열혈전기였는데,
동시 접속자 70만명, 누적회원 2억명을 넘기며
중국 온라인 게임 시장 점유율의 60% 이상을 차지합니다.
사실상 중국 1세대 PC방 인프라를 깔게 만든 일등 공신이었죠.
이로인해 보통 이 시기를 다룬 소설에서는,
보통 'H.O.T'와 같은 한국 연예인에 빠진 여학생에 대한 묘사가
한번씩은 등장합니다.
보통 중국 남자연예인과, 한국 아이돌의 외모를 비교해서 평가하는 식이죠.
물론 이 때에도 서브컬쳐(애니메이션/콘솔게임)에 한해서는
일본의 영향력이 여전했지만,
사실 대중들의 주류 라이프스타일(패션, 뷰티, 음악, 드라마)에 있어선
한국의 영향력이 일본을 완전히 압도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의 이미지는,
'가장 세련되고, 가장 부유하며, 따라해야 하는'
프리미엄이 붙은 이미지였습니다.
한국의 패션, 삼성의 애니콜, 아이리버MP3, 한국 화장품을,
밀수하거나 카피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가 있는 시대였기도 하죠.
9. 한류의 끝(2016)
중국이 이러한 한류의 파급력에 위기감을 느끼고
본격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한 것은
2005년 중국 후난위성TV에 방영된 대장금이 기점이었습니다.
이 드라마가 중국 전역에서 시청률 1위를 찍을 정도로 신드롬을 일으키자,
중국은 자국 컨텐츠를 보호하기 위해,
외국 드라마는 저녁 황금시간대에 방영할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었고
결국 한국 드라마는 심야시간으로 밀려나게 되었을 뿐더러,
국영방송 등에서의 한국드라마 방영 횟수또한 급감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인터넷 동영상 플랫폼을 통해 우회적으로 계속 수출되었고,
2014년엔 '별에서 온 그대'가 중국 인터넷을 말 그대로 초토화 시키는 등
한류의 생명력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2016년 사드사태 이후 한한령이 생기며
탑다운 형식의 중국 내 반한감정이 주입되기 시작했고
이 즈음 중국에서 팽배해진 국수주의(애국주의) 분위기와 맞물려
반한정서에 대한 강력한 동조압력이 서서히 형성되게 된 거죠.
이후부터 중국의 웹소설 작가들은
친한적인 묘사를 할 경우 독자의 신고테러나 검열을 받을 수 있어,
한국을 부정적으로 그리거나
사족같은 혐오 표현을 뜬금없이 집어넣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죠.
하지만 사실,
중국 소설 속에서 한국에 대한 이야기가,
좋든 나쁘든 뜬금없이 사족같이 등장하든
이는 그만큼
2000년대 초를 살아온 중국 사람들의 삶 속에
한류 문화 컨텐츠의 파급력이 매우 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국은 무려 14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세계 최다 접경국입니다.
러시아, 인도, 북한, 베트남, 미얀마, 파키스탄, 몽골, 카자흐스탄 등 정말 많죠.
그러나 중국 현대물 웹소설에서,
이러한 국가들에 대한 언급은 아예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러시아 유행가를 듣고, 인도제 화장품을 밀수하며, 북한 패션을 따라한다?
듣기만 해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그런 내용은 단 한 줄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다른 중국의 주변국들과 달리,
문화적 소프트파워와, 선망성이란 두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던 만큼
그 시대를 살아간 중국 대중들의
일상, 패션, 음악, 그리고 청춘의 추억 속 한 조각이 될 수 있었던 거죠.
10. 연대물 속 중국이 바라보는 세계 (-굳이 한류만 특별 할 리가?)
사실 소설 속에서 한류가 그리 크게 다뤄지는 일은 없습니다.
중국인들에게 절대적인 부와 세계화의 상징은
미국과 유럽의 문화였죠.
NBA, 나이키, 맥도날드, 애플, 각종 명품들, 프리미어리그, 월스트리트, 페라리...
서양에 대한 동경이 너무 강해서,
소설 속 주인공들이 부동산 광풍 시기 직전
부유층 단지의 별장을 구매할 때면,
이러한 건물들의 외장이 유럽식으로 지어진 것이 종종 묘사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유럽은 라이프스타일이나 성관념이 중국과 워낙 다르고 이질적이었기에,
궁극적인 성공의 정착지로 묘사될 순 있어도
10대~20대 시절의 일상의 문화로는 잘 등장하지 않죠.
일본의 경우엔 80년대엔 가전제품의 영향력이 매우 컸고,
이후엔 서브컬쳐(애니메이션, 콘솔게임)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미쳤지만
역사적인 반일감정이란 유리천장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 대중들은 애니메이션은 즐겼지만,
일본식 패션이나, 일본인처럼 행동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금기시 되었죠.
반면 한국의 문화는 정서적 공감대와, 모방의 용이성이 있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비싼 수입품과 달리,
한국의 컨텐츠나 상품은 당시 중국 청년들의 지갑 사정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던 가성비 좋은 트렌드였기 때문에
'당시'의 중국 사람들의 일상 속에 파고들이가 용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1. 중국의 부동산 투기 광풍(2008)
2000년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읽다보면,
대도시 외곽의 허름한 시골마을 사람들 전체가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어
페라리 등 고급차를 끌고 다니며 한량처럼 지내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렇게 부동산으로 벼락부자가 되는 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중국이 1988년에 헌법 개정을 통해 '토지사용권의 양도'를
전격 합법화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1998년엔 국가가 집을 배급해주던 주택 분배제도마저 완전 폐지되면서
중국에는 본격적인 부동산 투기의 서막이 오르죠.
소설을 읽다보면 성중촌(도시 속 촌락)이란 단어가 종종 보이는데,
2000년대 들어 선전, 광저우, 베이징 같은 대도시들이 미친듯이 팽창하면서
도시 외각의 농촌 마을들이 도심 한가운데로 편입되어 버리죠.
건설사는 고층 아파트를 짓기 위해 이 마을들을 싹 밀어야 했는데,
이 때 천문학적인 철거 보상금과, 신축 아파트 여러 채를 쥐어주게 됩니다.
이렇게 하루 아침에 수십, 수백억원대 자산가가 된 사람들을,
철거호(철거 벼락부자)라고 부르죠.
자기 집 벽에 철거를 뜻하는 붉은색 '찰'자가 적히면
그 마을 전체가 그 날부터 잔치를 벌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부동산 광풍이 국가적 규모의 광기로 번진 것은,
2008년 금융위기 직후였죠.
중국은 경기 부양을 위해 막대한 돈을 풀었는데,
이 자금이 모두 부동산을 향했습니다.
집값은 자고 일어나면 폭등했고,
빚을 내어 땅을 사고, 아직 짓지도 않은 아파트를 선분양해서
이 받은 돈으로 또 다른 땅을 사는
폰지사기 식의 문어발 확장이 시작되었죠.
결국 중국인들 전체 가계 자산의 무려 80%가
부동산에 묶이게 되는 기형적인 경제구조로 치닫게 됩니다.
이 거품이 꺼진 것은 2020년입니다.
중국 정부는 건설사들의 대출을 강력하게 옥죄는 3대 정책을 펼치고
이는 중국 부동산 1위 기업이었던 헝다의 파산으로 이어지죠.
이후 다른 대형 건설사도 도미노처럼 무너지게 되며,
중국 전역에는 짓다 만 흉물 아파트들이 수천만 채나 방치되게 됩니다.
12. 소수민족 특혜(당근)와 탄압(채찍)
우리는 중국의 소수민족 하면, 티베트나 위구르족 탄압만 떠올리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의외로 소수민족에 대한 특혜에 관한 이야기가 설핏설핏 등장합니다.
예를들어 어떤 소수민족 학생이
성적은 낮았지만 엄청난 가산점을 받아
주인공과 같은 유명 명문대에 들어오는 내용이 나오기도 하고,
주인공이 대학에 입학한 직후 항상 등장하는 군사훈련 에피소드에선,
소수민족 출신이 뜨거운 태양빛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혹시 소수민족을 차별했다는 비판을 받아 큰 문제로 번질까봐
황급히 대응하는 모습이 나오기도 하죠.
실제로 중국에선 한자녀 정책 시절에도
소수민족은 아이를 3명까지도 낳을 수 있었고,
세금 감면 혜택도 많아서,
부모 중 한 명이 소수민족일 경우 자녀의 민족을 소수민족으로 등록하거나,
아예 서류를 위조해 소수민족으로 신분을 바꾸려다 적발되는 사건이
2000년대 이후 빈번하게 발생하기까지 하게 되죠.
이러한 특혜는 1950년에 시작되어 1980년대에 이미 체계화되었고,
반대로 탄압 또한 독립움직임이 있는 소수민족을 중심으로
1949년에 시작되어 주기적으로 가혹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위구르족은 튀르크계 민족으로, 수니파 이슬람교를 문화적 정체성으로 가집니다.
2001년 미국의 9.11 테러 이 후, 중국은 위구르족의 분리독립 운동을,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로 규정해 탄압하기 시작하죠.
티베트는 티베트불교를 문화적 정체성으로 가지며,
티베트는 1950년 중국에 병합되었는데
이 후 탄압에 반발해 1959년 대규모 티베트 봉기가 일어나고
이를 유혈 진압하게 되며 달라이라마가 인도로 망명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13. 꽌시
꽌시의 가장 큰 위력은 법과 규제를 무력화(우회)하는 것입니다.
꽌시가 강력하면 세무조사를 피하고, 범죄를 저질러도 덮어지며,
경쟁자의 사업장을 합법을 가장해 묻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기제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이나
우리나라에도 똑같이 존재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중국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꽌시는 우리 입장에선 매우 기괴하게 느껴집니다.
그 까닭은,
보통의 나라에선 이것이 최상위 권력층, 거대 자본,
혹은 정치권이나 사법부 내에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즉 일반인의 경우엔 사업이 일정 이상 궤도에 오르거나,
혹은 사법적 문제가 생기며
'그들만의 리그'에 들어섰을 때야 비로소 체감하게 됩니다.
반면 중국에선,
그 적용범위나 스케일이 민간인의 일상까지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체감의 정도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국의 꽌시는 왜 시민들의 일상까지 깊숙히 침투하게 되었는가?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중국은 과거부터 영토가 너무 넓어
중앙정부의 행정력이나 법이 지방 구석구석까지 미치지 못했습니다.
법이나 치안이 나를 지켜주지 못하므로,
나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울타리는 '혈연'
아니면 '지연'(지역공동체) 뿐이었죠.
국가시스템의 부재를
인맥이라는 사적 안전망으로 대체한 것이 꽌시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둘째, 중국은 정치체제가 엘리트주의라서 권력이 법 위에 군림합니다.
법조항 자체도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 담당 관료의 재량권이 절대적이죠.
어떤 일을 하건,
관료가 안 된다고 하면 합법적인 일도 불법이 되고,
관료가 된다고 하면 불법적인 일도 합법이 됩니다.
또한 그 출발점이 공산주의였던 국가가,
뒤늦게 자본주의로 경제체제를 변경하면서도
당의 정체성은 기존 그대로 유지하려다보니
이후의 모든 정책들은 근본적으로 모순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이 모호함이 머무는 모든 곳에서,
실권자의 판단이 생과 사를 결정하다보니
꽌시는 생존의 문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셋째, 문화대혁명 때 생긴 시스템에 대한 극도의 불신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인구는 많은데 생산력이 무너졌고
이를 회복하는 과정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만성적인 물자부족이 수십년을 이어 오는 동안,
일상에서의 많은 물건들이,
표나 우선권(권력)이 없으면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자리 또한 마찬가지였죠.
인구가 너무 많은데 양질의 일자리는 부족하다보니,
농사에서 벗어나 농민공이 되려 해도
그 자리를 돈을 내고 사야 하거나 인맥에 기대어 얻어야 했습니다.
좋은 학교에 들어가려 해도 자리가 부족하니 교장과의 꽌시가 필요하고,
가족이 아파서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으려고 해도 의사와의 꽌시가 필요합니다.
동네에서 작은 식당을 열어도, 위생국 말단 공무원과의 꽌시가 필요합니다.
즉 시스템에 의존해서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시스템 외적인 꽌시를 믿고 의존하는 관행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꽌시는 문화대혁명의 광기어린 시절동안
시민들의 일상까지 침투했고,
먹고 사는 문제를 포괄해 심지어 생사까지도 결정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운명 공동체'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특정 목적을 위해 한 번 만나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무한 책임'에 이른 것이죠.
이로인해 소설 속 주인공이 고위 관료와 꽌시를 맺으려면 사적인 관계를 매우 중시해야 합니다.
단순히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관료의 자녀 일자리, 유학을 책임지고,
병원의 특실을 잡아주거나, 사적인 경조사를 가족처럼 챙겨야 하죠.
반면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땐, 법을 어겨서라도 나를 도와줘야 합니다.
정서적인 가치, 체면 세워주기, 감정적 헌신이 매우 중요시 여겨집니다.
현대 도시물 속 주인공들이 '꽌시'라는 거미줄을 짜는 이유는,
단순히 탐욕 때문이 아니라
그 거미줄 밖으로 벗어나는 순간 언제든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뜯어먹힐 수 있다는
원초적 공포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14. 북한과의 관계(1991~)
많은 사람들은,
중국과 북한의 관계가 마치 미국과 한국과의 관계와 유사할 거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다릅니다.
1977년 이후의 중국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외화를 벌기 위해 미쳐있던 시절이다보니
친미 친서방적인 마인드를 수십년에 걸쳐 끌고갔습니다.
그러다보니 1991년에 소련이 스스로 버티지 못하고 쪼개진 이후부터는
북한은 기댈 곳이 없어지는 상황이 되었고,
중국은 북한의 방식을 전혀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80년대 초만하더라도 북한은 중국 내지보다 경제수준이 높았을지 모르지만,
소련이 무너진 후부터는 북한은 완전히 고립되었으며,
중국 사람들에게도 '한국전쟁'을 회고할 수 있는 세대를 제외하곤,
북한은 매우 생소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소설 속에서도,
노예, 빈털터리, 소말리아, 알카에다, 경직된 교조주의라는 단어와 함께 묘사됩니다.
이는 우리가 바라보는 북한의 모습과 동일하죠.
15. 검열(2010~)
중국 내 웹소설들은 정치적 소재에 대해 검열이 무척 심합니다.
2010년 이후를 기점으로 이 기조는 점차 심해지죠.
연예인이나 기업가의 이름은 실명을 그대로 써도 되지만,
정치인들의 이름은 자동 삭제처리되거나
혹은 편집자의 검열 혹은 독자의 신고로 해당 화 자체가 날아가기도 합니다.
어디가 문제가 되어 해당 화가 삭제되었는지를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현대 도시소설을 쓰는 작가들은 이로인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며
때론 스토리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게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압력 때문에,
현대 도시소설을 쓰는 작가들은 검열과 신고를 피하기 위해
사족과 같이 '사상검증' 문장들을 끼워넣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좀 특이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사실 이는 마치 우리나라 커뮤니티들에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글을 쓸 때면,
국내 정치의 경우 '나 OOO 지지잔데'로 시작하고,
남북간 정세나 중국간 정세의 경우,
특정인에 대한 욕을 박으며 글을 시작하는 것과
동일한 방어기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어떠한 동조압력이 그 사회에 형성되어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중국 웹소설을 살펴보면,
'국가(당)에 대한 믿음과, 충성'에 대한 동조압력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처럼 '공산주의'에 대한 동조압력은 없습니다.
왜냐면 조금의 지능과 눈치만 있어도,
자본주의 특유의 부의 쏠림 현상으로 인해
중국의 절대 다수의 권력자들이 막대한 부를 갖춘 자본가가 되었을 것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검열과 탄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임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상황에선 국가에 대한 당의 통제력을 유지하는 것만이 중요 과제일 뿐이죠.
따라서 중국의 웹소설들은 모두 자본주의 세계관을 갖추고 있기에
우리나라 사람이 읽더라도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큰 이질감이 없어 상당히 친숙하게 받아들여지는 편입니다.
이는 마치 한류의 컨텐츠가 중국에서 친숙하게 받아들여지는 것과 비슷한 거죠.
다만 엘리트주의의 잔혹성이 표현되는 에피소드들에선,
다소 당혹감과 위화감을 느끼게 되기 쉽습니다.
국내에선 사법 카르텔의 부패와 무소불위성 정도가 이에 비견될 뿐입니다.
16. 마무리
사실 현시점에서 보자면,
중국은 대단히 운이 좋은 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중국의 역사는,
중앙 권력의 약화가 지역 군벌의 할거로 이어지고,
수천만명이 죽는 내전이라는 공식이 이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중국웹소설의 피난물 장르를 읽어본 사람들은 다들 체감하겠지만,
거대한 통일제국이 내부 모순으로 쪼개져
수십 수백년간 끔찍한 군벌 내전을 치르는 상황에서
시민들의 현실은 매우 참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중국인들이 난세의 고통을 얼마나 뼈저리게 느끼는지를 보여주는
유명한 관용구가 있습니다.
"평화로운 시대의 개가 될 지언정, 난세의 사람은 되지 않겠다."
현대 사회에서 '내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난세입니다.
현재 지구상에서 난세에 고통받는 국가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 + 엘리트주의 정치체제 + 내전(그에 준하는 무력충돌)
멕시코, 콜롬비아, 미얀마, 필리핀, 우크라이나,
그리고 콩고 등 아프리카 국가들..
그런 수많은 국가들이 끝나지 않는 내전에 빠져
기약할 수 없는 무질서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시민들은 마약과 탄환에 신음하며 소수의 권력자에게 유린당하고 있죠.
우리나라도 1993년에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군부독재의 엘리트주의 정치체제였던 국가고,
최근에는 계엄을 통해 민주주의에서 엘리트주의(독재)로
회귀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이 때에 전쟁을 유발하고,
특수한 상황을 이용해 반대진영을 숙청하면
그 혼란 속에서 경제는 망하고
대다수 시민들은 고통받지만
한 국가를 사유화한다는 것은,
마치 거대한 농장과 노예를 거느린 지주가 된 것과 같습니다.
시민들에겐 난세지만, 권력자에겐 부귀영화인 것이죠.
점차 패권주의로 치닫는 국제 정세 속에서
난세를 피할 수 있었던 운이라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가.
평화 속에 일생을 사는 것이 얼마나 운이 좋은 것인가를
계속 생각하게 되는 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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