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우리 집은 할머니와 미혼이었던 고모까지 함께 사는 북적이는 대가족이었어요. 당시엔 옆집도 뒷집도 흔한 풍경이었죠. 11월이면 집집마다 연탄을 쌓으러 오던 연탄 트럭, 겨울 골목마다 쌓여있던 하얀 연탄재들. 여름이면 동네를 뒤덮던 소독차 연기를 따라다니던 아이들의 함성까지... 평상에 앉아 계시던 동네 할머니들은 이제 대부분 고인이 되셨겠지요.
저녁이면 온 가족이 거실의 작은 TV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습니다. 대학생 고모부터 어린 오빠와 나까지, 우린 모두 같은 드라마를 보고 같은 노래를 들었습니다. 주현미와 소방차의 리듬이 흐르고, 김현식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어린 마음에도 왠지 모를 슬픔을 남기곤 했습니다. 아빠는 손님이 오실 때면 우리에게 '호랑나비' 춤을 시켰고, 우린 용돈을 기대하며 'ㄱㄴ' 춤을 추고 '개똥벌레'를 열창하곤 했어요.
지금처럼 채널만 돌리면 볼거리가 넘쳐나는 시대가 아니었기에, 일요일 오전 만화영화는 목숨 걸고 사수해야 할 성역이었습니다. 그리고 1988년 서울 올림픽. 온 동네 아이들이 호돌이 티셔츠를 입고 뛰어다녔고, 그때 저는 서울의 끝자락에 살았었는데 서울과 경기의 경계선에 호돌이 동상이 서 있던게 기억나요.
우리집만 그랬던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절 외식은 참 귀했어요. 매일 오후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가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죠. 어쩌다 20대였던 고모가 서울 시내에 데려가 팬시용품과 햄버거, 피자를 사주는 날이면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습니다.
1990년대
90년대는 그야말로 대중문화의 전성기였어요. 등교하자마자 어제 본 드라마와 라디오 이야기로 교실은 늘 들썩였어요. 모래시계, 서울의 달, 질투, 느낌... 30년이 넘게 흐른 지금도 스토리가 선명합니다. 아직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정재, 이병헌, 정우성, 고현정 같은 스타들의 신인 시절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길거리엔 김건모, 신승훈, 솔리드, 전람회의 노래가 끊이지 않았죠. 새 앨범이 나오는 날이면 레코드점에 예약해두고 설레며 기다렸고, 때로는 시내에서 '9월 인기가요 모음집' 같은 길거리 테이프를 사기도 했어요. 밤이 되면 이본, 이소라, 유희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고등학생 땐 새벽까지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을 들으며 밤을 지새웠어요. 교실은 H.O.T.와 젝스키스 팬으로 나뉘었지만, 결국 우린 같은 시대의 공기를 마시며 같은 음악을 들으며 자랐어요.
아직도 멋진 톰크루즈, 브래드 피트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영화를 보러 영화관을 가고 비디오를 빌려 보던 날들. 때론 겉멋에 취해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찾아보고 잡지 <스크린>을 매달 사서 친구들과 돌려보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1994년, 신도시 아파트로 이사하며 누렸던 그 쾌적함. 엄마는 문화센터에서 수영을 배우고 백화점에서 시간을 보내는 새로운 일상을 즐겼고.. 그때부터 외식도 자주 했던것 같아요.
하지만 즐겁기만 하던 10대의 끝자락에 찾아온 IMF... 갑자기 학교에 오지 않는 친구들, 가게마다 붙은 '눈물의 폭탄세일' 현수막들... 동시에 박찬호와 박세리를 보며 열광했어요. 좌절과 환호가 공존하던 시절이었습니다.
2000년대
2000년 노량진. 새벽부터 줄 서서 수강 등록을 하던 정진학원과 한샘학원 시절을 아시는 분 계실까요? 노량진 육교가 사라지니 왠지 이제는 노량진이 아닌 느낌이에요.
2002년엔 붉은 티셔츠를 입고 광화문에서 '대한민국'을 외쳤고
이후 '싸이월드'라는 신세계를 만났어요. 미니홈피를 꾸미고 방문자 수에 일희일비하며, 우린 처음으로 SNS라는 공간을 경험했습니다.
살인의 추억과 올드보이의 등장도 기억나요. 박찬욱, 봉준호라는 거장의 탄생과 성장을 모두 지켜본 복받은 세대인것 같아요.
정치에 관심없던 내가 처음으로 정치에 관심도 갖고.. 내 손으로 직접 뽑은 첫 대통령의 당선에 설레고, 그의 마지막에 함께 눈물 흘렸던 20대였습니다.
스마트 폰이 등장하면서 모든것이 빠르게 변해간것 같아요. 이제 더이상 모두가 같은 시간에 같은 것을 보지 않아도 되는 세상..
김연아의 경기에 모두가 숨죽이고 월요일 아침이면 무한도전 본 얘기를 하던 시절이 공동의 문화를 향유하던 마지막 시절이었을까요..
지금은 각자의 섬에서 살아가는 것같아요. 넷플릭스, 유튜브에서 누군가는 미드를 보고, 누군가는 알고리즘이 추천한 영상을, 누군가는 숏폼에 빠져 있습니다. "어제 그거 봤어?"라는 질문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 각자의 취향은 존중받지만,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던 공통분모는 조금씩 사라져가는 것 같아요.
세상은 훨씬 편리하고 빨라졌지만, 함께 기다리고 함께 울고 웃던 시절이 그리워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건너오며 이 거대한 변화를 모두 경험할 수 있었음에 감사합니다.
우리는 집단의 열광을 아는 세대이고, 세계적인 거장들과 동시대를 살았으며, 같은 노래를 듣고 부르던 온기를 기억합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일까요? 옛날이 그립네요.. 그냥 세상이 재미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