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설 연휴 마지막날 서울시내 고궁 5곳과 종묘를 잇는 나만의 투어코스를 짜서 다녀와봤어요
작년 무슨 바람이 들어서 미술관 핑계로 단풍 핑계로 각 궁은 다 여러번 다녀왔었는데 한번에 묶어서 다녀온 건 처음이예요
출발 전, 네이버 지도로 대략 감 잡아보니, 덕수궁 출발 청계천 거쳐서 종묘, 창경궁, 창덕궁, 경복궁, 경희궁 순서로 가면 대략 10 킬로 정도 나오는 거리더군요.
평소 운동삼아 10 킬로 정도 걷는 건 늘상 하는 정도라, 쉽군 하면서 시작했습니다
시청역에서 출발했는데, 일단 덕수궁 말고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부터 시작했습니다
하필 시립미술관 앞 시청역 출구로 나오는 바람에 ㅎㅎㅎ
현대미술은 잘 몰라서 어려워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이해해보려고 눈에 일단은 많이 바르고 봅니다
이해를 하든 못하든 좋은지 싫은지조차 판단이 안되고 아무생각이 안들어도 일단은 봅니다
아랍에미레이트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된 '근접한 세계'와 최재은 작가의 '약속'이라는 전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최재은 작가의 '약속' 전시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즘 현대미술은 단지 우리가 생각하는 미술의 영역을 훨씬 뛰어넘어 장르를 넘나들고 수없이 많은 영역의 전문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거대한 프로젝트를 해내는 경우가 많은데, 최재은 작가의 이번 전시회에서 충격적인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장기간 이끌어오는 작가의 역량도 좀 느껴지고, 지금의 현대미술은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는구나 하는 새로운 면모를 보았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머릿속에 뭔가를 꾸깃꾸깃 집어넣고 정동 덕수궁 돌담길을 되짚어 덕수궁 대한문으로 들어갔습니다. 덕수궁 미술관에 자주 오기 때문에 그때마다 덕수궁은 여러차례 둘러봐서 딱히 열심히 볼 생각은 없었고 덕수궁 미술관 현재 전시도 이미 2번 봤던 전시라 한바퀴 산책만 하고 패스하려고 했으나, 돈덕전에서 국가유산청과 쿠키런의 합작 프로젝트 특별전이 열리고 있어서 들어가봤습니다
요즘 국립중앙박물관이 블랙핑크와 협업하는 등, 국가기관이 이전의 고루한 전통만을 고집하지 않고 젊은 세대와의 새로운 소통방식을 찾아내는 재미있는 기획들이 많아서 신기하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쿠키런 협업도 그런 기획의 일환이라 생각되서 귀엽고 재미있더군요. 물론 저같은 나이많은 옛날 사람은 쿠키런이 그냥 게임캐릭터인 줄만 알고(그래도 게임 캐릭터인 걸 알고 있다는게 신통하지 않습니까? ㅎㅎㅎ) 그게 뭔 재미인지 정확하게 몰라서 그걸 열심히 이용한 젊은, 어린 친구들에게 어필하는 느낌과는 전혀 다르지만, 이런 접근 좋아 보이더군요.
내용이야 제 나이쯤 되면 여기저기서 줏어들은 걸로 다 아니 딱히 재미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미디어 아트로 재창조해서 풀어놓은 작품들은 한번쯤 볼만하다 싶더군요. 애기들은 2층에 마련된 굿즈와 게임을 좋아하더라구요. 1층에 설치된 서울시내를 재구성한 대형 미디어 아트작품이 꽤 흥미로왔습니다.
돈덕전을 나와 쪽문으로 나와 고종의 길을 따라 경희궁으로 갑니다
애초 예상한 코스와 다르게 발길 가는대로 가보는 겁니다
경희궁은 워낙 조각조각 잘려나가고 다른 궁보다 훨씬 많이 축소되서 궁이라고 하기에도 미안한 정도로 쪼그라들었지만, 그래도 한바퀴 휙 돕니다.
조선시대에는 제법 많은 왕들이 경희궁을 주 거처로 삼았던가본데, 지금 쪼그라든 모습은 과연 여기서 왕이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작고 소박하죠. 원래 정문이 구세군회관 앞에 있었다니 지금 남아있는 구역은 원래 크기의 절반은 되나 싶어서 경희궁은 올 때마다 애잔하고 안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아무튼 경희궁 뒤로 궁 뒷동네로 연결된 난 작은 오솔길로 나가 정부종합청사 뒷길로 해서 경복궁으로 갑니다
경복궁으로 가는 중간에 국립고궁박물관을 지나는데, 'Re-Born; 시간을 잇는 보존과학' 특별전이 열린다는 현수막을 보고 잠깐 그것만 보고 가자 싶어 들어갔습니다
생각보다 섬세하고 과학적인 보존과학에 대한 설명을 간단하지만 깊이있게 알게해줘서 나름 괜찮은 전시였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한번쯤 볼만하다 싶습니다. 전시규모는 작아서 시시하게 생각될런지 모르지만 전혀 만나보지 못했던 생소한 분야를 알게되는 첫 경험으로는 훌륭했습니다
경복궁이 오궁 가운데 가장 크고 규모가 번듯해서 뭐니뭐니해도 제일 궁답습니다
다른 궁에도 사람이 많긴 많았지만, 경복궁의 인파는 정말 어마어마하더군요.
절반은 내국인, 절반은 한복입은 외국인? ㅎㅎㅎ
입장하는데 대기줄이 50 미터는 되는 듯...
궁에 줄서서 들어가는 건 처음이지 싶습니다. 무료입장이라 그런가 줄은 길어도 슉슉 빨리빨리 들어갑니다
지난 가을에 이미 경복궁을 샅샅이 탐험한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경회루와 향원정만 한바퀴 돌기로 합니다
경복궁은 워낙 넓어서 이 두곳만 연결해도 거의 경복궁의 절반은 산책하는 루트입니다.
가을 단풍이 남았을 때에 비해서 낭만적이지 않지만, 경회루, 향원정은 참 번듯하고 근사합니다.
경복궁 옆 국립민속박물관 마당을 가로질러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갑니다
민속박물관에도 뭔가 재미난 기획전을 하나본데, 이번엔 아쉽지만 패스~
몇주 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설계한 홍익대 건축학과 민현준 교수가 쓴 '셰이프리스 미술관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건축 10년 후의 기록'이란 책을 아주 흥미롭게 읽은 터라, 일부러 들렀습니다.
여러번 와 봤는데도, 이 책을 읽다보니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한 곳들이 많아서 일부러 여기저기 쑤시고 다녔습니다. 건축가가 쓴 책을 몇권 읽어봤는데, 제가 그쪽으로 문외한이라 그런가 실제 건축가의 설계의도를 실물 건축에서 연결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 미술관은 내가 막연히 생각했던 것들이 건축가의 설계 의도였다는 것, 그 의도대로 일반대중이 충분히 느끼게 만들어졌다는 것이 참 색다르게 감동적이더군요. 나같은 평범한 관람객이 이 건물에 들어와서 너무나 좋았던 것들이 건축가가 의도한 대로 느꼈고 그걸 똑같이 좋게 봐주었다는 걸 알면 본인의 의도가 전달되었다는 점에서 건축가가 좋아하겠지? 싶기도 하고 건축이라는 것이 구구한 설명없이도 의도가 전달되도록 지을 수도 있는 거구나 그래서 나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좋아하게도 만들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기뻤습니다.
상설전인 소장작품 하이라이트 전은 여러차례 이미 봤기 때문에 패스하고 '소멸의 시학 : 삭는 미술에 대하여'만 보고 갑니다
역시 현대미술은 쉽지 않습니다. 이젠 미술의 경계가 어디까지인가 늙은 옛날 사람의 인식을 자꾸 새로고침하도록 요구합니다만, 아,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 전시는 다른 전시에 비해서는 알아먹을만 하고 이해할만하고 의도를 좀 알 것 같기는 합니다. 지난 달 다른 미술관에서 본 '일렉트릭 쇼크'같은 전시를 보며, 이게 뭥미? 했던 것에 비하면 제게는 그나마 좀 낫더이다
자, 미술관을 빠져나와 이제 계동, 가회동 북촌 뒷길로 창덕궁을 향해 갑니다
한때 말많았던 런던 베이글 뮤지엄 앞에도 대목이라 그런가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대기줄이 좀 있기는 있더군요. 다만 예전의 고압적인 태도와는 달리 대기자를 위한 배려들이 좀 생겼다 뭐 이런 게 좀 다르긴 하더구만요.
단풍시즌에 와서 실컷 놀다가기도 했고 후원은 예약도 안해서 낙선재까지만 한바퀴 돌기로 합니다.
오궁 가운데는 창덕궁이 제일 아늑하기는 합니다. 산책하는 맛도 나고...
낙선재만 한바퀴 보고 후원 출입구 옆에 있는 창경궁 출구를 통해 창경궁으로 넘어갑니다
경희궁을 '서궐'이라 하고,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쳐서 '동궐'이라 했다는데, 이 두 궁은 위치상으로도 딱 붙어있어서 따로 구획된 것 자체가 신기하긴 합니다.
얼마전 김금희 작가의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흥미롭게 읽었기 때문에 이 소설의 주무대 창경궁 대온실과 춘당지까지 한바퀴 돌아나오기로 합니다. 이 소설을 읽기 전에도 춘당지와 대온실 구역을 좋아했던 터라, 이 소설이 제 구미를 당기게 했었고 이런 소재로 이런 소설을? 싶은 상상력이 좋았습니다.
소설을 읽은지 얼마 안되는지라, 춘당지와 대온실을 한바퀴 돌아나오면서 소설을 다시 곱씹어보는 재미도 좋았습니다.
창경궁은 궁이면서 궁같지 않은 아기자기함이 참 좋은 듯 합니다
뭐랄까 경복궁은 대소신료들과 쌈박질하면서 정쟁하며 정치와 외교를 해야하는 공간, 창덕궁은 그런 거 다 물리고 편히 쉬는 집같은 느낌, 창경궁은 알콩달콩 소꿉놀이하고 싶은, 남들한테는 숨기고 나만 즐기고 싶은 공간이라고 해야할까? 베르사이유 궁의 쁘띠 트리아농이던가? 혼자 노는 별궁같은 분위기라고 해야하나, 제게는 좀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물론 분위기나 사이즈, 스케일이 비교가 안되긴 하지만, 뭔가 궁이면서 궁같지 않은 매우 사적인 느낌? ㅎㅎㅎ
창경궁과 종묘는 율곡로를 가로지르는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가 국민학교 시절에는 좁은 구름다리였는데, 지금은 어마어마한 공사를 통해 구름다리가 아니라 거의 터널급으로 넓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창경궁, 종묘를 서로 건너다가다보면 그 아래로 터널 안 왕복 4차선 도로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더군요.
명절 연휴에 고궁을 찾는 재미 중 하나는 무료입장이라는 이득 말고 창덕궁, 창경궁, 종묘까지 방해받지 않고 왔다갔다 들락날락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된다는 점이 재미인 것 같습니다.
종묘는 평일에 창경궁 쪽 율곡문이 개방 안되는 걸로 알고 있고 주말이나 공휴일에 개방이 된다하더라도 각각 입장료를 내고 한번 나가면 재입장 불가라는 결코 이쁘지 않은 경고문을 보면서 출입에 눈치를 봐야하는데 명절 무료 개방에는 그런 눈치없이 오고갈 수 있다는 것이 좋습니다.
저한테 종묘는 아직 무슨 느낌을 주지 않습니다
안내문, 각종 책에 소개된 건축학적, 미학적 설명, 각종 미디어의 강의를 읽고 듣고 봐도 그렇다니까 그런가 할 뿐, 그것이 아직 저한테 직접적인 깨우침이나 영감, 좋고 싫음의 뭔가를 느끼게 하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여러번 와보면 뭔가 느낌이 올까 싶어서 때때로 생각날 때마다 와 볼 생각입니다
계절이 다르면 또 뭔가 다른 느낌이 들려나 싶어서 꽃 필때, 신록이 눈부실 때, 단풍들 때, 눈올 때, 아무튼 여러번 와보려고요.
이로써 처음 목표한 오궁 투어는 끝났지만, 아직 낮이 조금 남아있어 마지막으로 한군데 더 보기로 합니다
종묘에서 멀지 않은 동대문 근처에 서울시립미술관 분관인 '백남준을 기억하는 집'까지 가보기로 합니다
번잡한 종묘 앞 종로통을 벗어나 한블럭 넘어 청계천 산책로로 동대문까지 걸었습니다
핸드폰 배터리도 바닥나서 네비게이션도 켤 수 없는데, 뒷골목에 위치한 '백남준 기념관'은 찾기 드럽게 힘들더이다. 마침 근처를 지나시던 청소부 분께 골목골목을 샅샅이 돌아다니시는 분일 것 같아서 물었는데도 모르신다하시고, 아시안 마켓 사장님께 물어도 잘 모르겠다 하시고... ㅎㅎㅎ
생각보다 전철역에서 제법 멀리 걸어가서 이젠 여기가 아닌게벼 하고 포기하기 직전에 겨우 찾았다는...
이렇게 처음 오는 곳을 찾아갈 때는 핸드폰 배터리 짱짱하게 충전해 가야하는데... ㅠㅠ
이 기념관은 매우 작습니다. 백남준이 어린시절 살았었다던 '큰대문집'은 한국 전쟁으로 완파되고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는데, 그 자리(? 그 근처 언저리?)에 조성된 작은 공간입니다.
현재는 상설 전시로 '메가트론 랩소디'가 전시되고 있습니다
전 백남준 작품을 봐도 아무 감흥이 없었습니다. 대단한 작품이라고 다들 그럴 때도 저게 뭥미? 할 뿐,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다다익선'을 갈 때마다 봐도 딱히 뭘 느끼고 생각해야하는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남들이 대단하니까 대단한가? 뭐 그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최근에 들어서 인터넷, 유튜브, 숏폼, 미디어 아트가 일상생활이 되면서 왜 백남준이 그렇게나 대단하고 센세이셔널했던가를 조금씩 조금씩 느껴오던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호기심에 가본 곳이고요.
'메가트론 랩소디'는 그의 전 생애를 간략하게 정리한 전시입니다.
저같이 백남준의 작품세계나 업적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입문으로 알기쉽게, 호기심을 가질 수 있도록 잘 정리되었습니다. 저는 이제서야 세계가 극찬하고 그의 미래성을 격찬했는지 이제야 조금 알듯말듯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백남준 작품을 좀 더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기회여서 좋았습니다.
설연휴 마감 기념 오궁 + 미술관 투어를 끝냈습니다
나름 재미있고 의미있었구요. 대략 12~3킬로 정도 걸은 것 같습니다(중간에 핸드폰이 죽어서 정확한 거리는 기록이 미진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두어시간이면 걸어갈 수 있는 거리긴 하지만, 중간중간 볼 것, 들릴 곳들이 많아서 시간은 하루를 거의 다 투자했습니다.
긴 연휴에 서울에서 뭐하지 생각이 들 때, 다른 분들도 참고하셔서 나만의 코스대로 한번 서울 중심가를 만끽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길게 주저리 주저리 적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