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하는 사람의 침묵
― 김영대 평론가를 추모하며
김영대 평론가의 부고는 한 시대의 귀가 닫혔다는 소식처럼 다가온다. 그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설명했지만, 자신의 죽음은 설명하지 못하고, 아니 설명하지 않고 우리와 이렇게 멀어져버렸다.
그는 노래를 소비의 대상으로 두지 않았다. 노래가 태어난 시간과 장소, 그 곡을 부르게 만든 세계의 균열과 욕망을 함께 들려주던 사람이었다.
대중음악이 단순한 유행이나 취향으로 소모되지 않도록, 그는 언제나 설명하는 자리, 해석의 자리, 맥락의 자리를 지켰다.
대중음악은 흔히 “느끼면 된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김영대는 달리 말했다. 느낌은 시작일 뿐이며, 이해될 때 음악은 더 깊어진다고.
정말로 이해하는 만큼 들렸다.
그는 음악을 설명하면서도 음악을 가두지 않았다. 오히려 설명을 통해 음악이 다시 살아 움직이게 했다. 같은 곡이 다르게 들리게 만드는 힘, 그것이 그의 평론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이었다.
그의 글과 말에는 유난한 과장이 없었다.
대신 정확함이 있었다.
아티스트를 숭배하지도,
대중을 얕보지도 않았다.
음악 산업의 구조, 시대정신의 변화, 장르의 계보를 차분히 짚으며, 지금 우리가 무엇을 듣고 있는지를 묻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평론은 ‘추천’이 아니라 ‘동반’에 가까웠다. 함께 듣고, 함께 생각하자는 제안이었다.
김영대는 대중음악을 문화로, 문화 를 다시 사회로 연결한 평론가였다. 아이돌 음악을 이야기할 때도, 인디 신(scene)을 설명할 때도, 그는 늘 질문을 남겼다. 왜 이 음악이 지금 여기서 사랑받는가. 무엇이 바뀌었고, 무엇이 반복되는가. 그 질문들은 음악을 넘어 우리가 사는 세계를 향해 열려 있었다.
그래서 그의 부재는 단순한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다. 설명해주던 목소리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혼란한 시대에 귀 기울여 들을 수 있게 해주던 안내선 하나가 끊어진 것이다.
아직 해야 할 말이 많았을 사람이다.
정리해야 할 음악의 역사도, 새롭게 등장한 목소리들도, 그가 풀어줄 언어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이별은 더욱 갑작스럽고, 더욱 아프다.
그러나 그는 남겼다. 글을 남겼고, 해석을 남겼고, 듣는 태도를 남겼다. 무엇보다 대중음악을 존중하는 방법을 남겼다. 쉽게 소비하지 않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며,
끝까지 들어보는 태도 말이다.
김영대 평론가의 삶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음악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음악이 태어난 세계까지 함께 사랑하려는 일이라고.
그의 명복을 빈다. 깊은 슬픔 속에 있을 가족과 지인들께 조용한 위로를 전한다. 그리고 남은 우리는, 그가 보여준 방식으로 계속 듣고, 설명하고, 연결해 나갈 것이다.
설명하는 사람이 떠난 자리에서
음악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그의 언어를 기억하는 귀들이 아직 살아 있으므로.
지성용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