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시작과 함께 다리 절단면에서 고름이 쏟아지던 내 환자는, 다시 방문한 이틀 후 결국 119를 불러 병원으로 이송했다.
상황이 점점 안좋아진다는 소식을 듣고 연휴 하루는 드라이브를 핑계 삼아 멀리 동쪽으로 달려 두 할망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명절 당일과 연휴의 마지막날, 한 분씩 임종 소식을 들어야 했다.
게다가, 병원에 입원했으니 좀 나아지겠지 싶었던 내 환자는, 패혈증 단계로 접어들며 점점 안좋아진다는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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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진료의 무게를 실감하는 연휴였다.
지속적으로 돌봄이 필요하고, 돌봄이 각자의 집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연휴는 방문진료하는 의료인에게는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다.
함께 방문간호를 하는 재가선터 간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돌보는 노인들이 점점 안좋아지고 있는 상황을 직접 보아야 하는 입장에서, 연휴는 오히려 묶인 족쇄를 더 무겁게 느끼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러했다.
집안 일로 섬을 떠나야했던 간호사는, 수시로 보호자와 동료 간호사와 나와 상황을 주고받아야 했다. 나는 휴진일 아침 일찍 사망진단서를 작성하러 병원에 출근해야 했고, 임종하신 할망 가까이 사는 간호사는 고인이 된 육체를 수습하는데 도우러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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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의 돌봄, 집에서의 임종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제도는 이를 긍정적으로 보고 독려하는 중이다.
의료진과 재가센터의 방문진료와 방문간호를 포함한 모든 돌봄의 행위는 어쩔 수 없이 노인의 임종기로 이어진다.
아직은 국가의 제도가 ‘내가 원하는 곳에서, 나의 존엄을 지키는 생의 마무리’를 제대로 존중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생의 흐름은, 그 흐름을 옆에서 살피는 손길은 자연스럽게 생의 마지막까지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이 둘 사이의 괴리를 겨우 메우고 있는 것은, 돌보는 이의 마음과 서로간의 정이다. 제도는 제대로 된 책임이나 보상을 해 주지 못한다. 그러니까, 연휴 내내 우리의 수고는, 이제껏 돌보아왔던 마음과 환자의 가족들과 형성된 라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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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돌봄을 우리보다 먼저 시작한 일본은, 방문진료 시스템을 기반으로 지역마다 응급대기를 하는 의료진들과, 집에서의 임종을 돕는 의료진들이 있다.
체계화된 방문진료 제도로, 돌봄 손길 자체의 부담을 덜어준다. 그
러니 방문진료에 좀 더 많은 의료인력이 진출해 있다.
우리나라의 방문진료와 돌봄은 제대로 된 보상보다 방문의료인과 돌봄인력의 마음과 인정에 의존하는 부분이 매우 크다.
수요가 점점 증가하는 노인돌봄에 의료인력이나 돌봄인력들이 발을 잘 들이려 하지 않는 이유다.
개인적 상황에서 단순히 생각해도, 편안한 실내 진료실에 앉아 오는 환자만 보고 쉬는 날 깔끔하게 쉬며 보내는 것이, 덥고 추운날 차를 몰아 환자 집을 찾아가고, 변화하는 환자상태에 노심초사하며 불편한 마음을 쉬는 날을 보내는 것보다 휠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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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입장에서 이런 방문진료를 하는 이유는 많은 경우 신념과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음가짐일 뿐, 수익을 위해 방문진료를 하는 경우는 전무하다 해도 틀리지 않는다.
연휴 내내 수고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수고’라는 단어 하나만 가지고 연휴를 말하자면, 나 외에도 직접 간호와 돌봄을 해야 했던 수많은 돌봄인력들, 그리고 쉬지 못하고 업장을 운영해야 했던 수많은 자영업자들, 그리고 시스템의 유지를 위해 쉬지 못했던 수많은 노동력들이 존재한다.
다만, 그런 수고가 제대로 보상을 받을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다시 방문돌봄의 영역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하자면, 돌봄의 끝은 돌봄받는 이의 임종이고, 그래서 돌봄과 집에서의 임종은 현재의 제도가 만들어놓은 것처럼 분리될 수 없다.
이 연속선상의 삶의 흐름이, 존엄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고, 이를 돕는 이들에게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도록 제도가 변화해야 하지 않을까..
나의 노심초사를 두고 보이는 곳에서 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몸을 직접 움직여야 했던 간호사들이 있었다. 수고와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