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50대 아줌마, 더 바랄게 없는 인생여행을 하고 왔어요^^ (feat. 노르웨이 & 페로제도)

좀 많이 길어요 ^^ 

 

 

 

작년에 노르웨이에 갔다가 나도 모르게 사랑에 빠지듯 뿅~ 가서 꼭 다시 와야지 생각했어요 

뭉크의 그림에 나올듯한 붉은 띠가 겹겹이 걸쳐진 일출을 개미새끼 한마리 없는 컴컴한 언덕에서 홀로 지켜보고, 방안의 불을 다 켠 것보다 환한 달빛에 한밤에 깨어 별천지 하늘을 구경하고, 광활한 피요르와 거대한 산, 콸콸 쏟아지는 폭포와 그들 너머 시시각각 변하는 해와 구름과 무지개의 춤을 넋나가게 바라보고, 노르웨이어의 요상한 억양과 å, æ, ø 같은 알파벳이 신기해서 찾아보다 결국 한국와서 노르웨이어 공부로 이어지고, 한강 작가 바로 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욘 포세라는 노르웨이 작가의 특이하고 신선한 글에 빠져 한국에 나온 번역본 다 읽고 것도 모자라 영어로 된 책도 사서 읽고...

그러면서 다음 여행을 꿈꾸었는데 1년 만에 다시 그곳으로! 

 

 

*떠나기 전 여행가서 하고 싶었던 것들

1.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기

2. 그동안 공부한 노르웨이어 몇마디라도 현지인들과 나눠보기 & 서점에서 한강 작가와 욘 포세의 노르웨이어판 책 찾아보고 책에 나온 거리와 분위기 느껴보기

3. 아래위로 긴 노르웨이의 안가본 북쪽 섬 로포텐에서 또다른 자연의 아름다움을 흠뻑 느껴보고 어부가 살던 빨간 바다위 집 로르부에서 지내며 일출과 일몰 보기 

4. 이번 여행에 높은 산과 벼랑 옆 능선을 타는 4시간여의 트래킹이 5번 들어있었는데 50대의 마지막 해에 건강한 다리로 완주하기 (이 여행을 위해 소쩍새 아니 아줌마는 봄부터 열쒸미 운동했답니다) & 바다처럼 넓은 페로 풀밭에 벌러덩 누워보기 & 땅끝에서 세상 내려다보는 사진 찍기

5. 섬들로 이루어진 로포텐과 페로제도의 풀, 돌, 바람, 바다 속에서 내 몸의 숨구멍을 다 열고 숭숭뚫린 죽부인이 되어 순도 100프로의 맑은 공기를 통과시켜 몸과 마음을 탈탈 털어내기 

 

결론은 "다 이루었도다!" (예수님은 아니지만 ㅎㅎ) 

보너스로 다양한 만남과 경이로운 자연의 수백가지 얼굴까지.. 부족한게 없는, 다~~~~가진 여행이었어요 

게다가 비행기 9번, 배 8번을 타며 한여름에 패딩에 목도리 두르고 여러나라와 섬을 건너다니니 진심 지구탐험 떠난 기분! 

 

 

*여행 속으로

1. 좋은 사람들 - 작년 어느 여행에 저 혼자 갔다가 만난 혼자 온 또다른 여성분, 생각과 말이 너무 잘 통해 바로 친구가 되고 1년 넘은 지금은 소울메이트로 지내요 

그래서 지난 겨울부터 이번 여행을 같이 준비했는데 여행갔다 웬수가 되는 경우도 흔해서 살짝 우려했지만(지금 이 좋은 관계가 깨질까) 매순간 같이 감동하고 같이 방방뛰고 같이 음미하고.. 친구의 마음씀씀이와 멋진 모습 덕분에 서로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여행을 하고 왔어요 

그리고 가는 곳마다 아름답고? 재미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로포텐의 땅끝 Å(오)마을에서 만난 스페인 알바생은 여름시즌에만 거기 와서 일하는데 피시슾 국물을 까만 주전자에 담아와 어찌나 감칠맛나게 따르던지.. 저게 막걸리도 아닌 것이 무엇이고.. 신기해서 보다가 못참고 시켜먹게 되었는데 태어나서 맛본 피시슾 중에 최고 최고!!! (시골 섬동네의 낡은 식당인데 맛, 색감, 셋팅은 파인다이닝 수준!) 

저희 테이블에 서빙하는 사이 한국말도 배우고 음식에 대한 설명도 친절하게.. 친화력 끝판왕! 햇살같이 밝은 눈웃음에 다들 녹아내림 ㅎㅎ

흐리고 추운 스볼베르 항구에서 투어 끝나고 우연찮게 들어간 펍 'Telegrafen'(전보)에서 본 독일 청년

술집 이름도 낭만적이고 분위기 화기애애한 것이 아시안 여성 둘이 들어가도 좋을듯 해서 들어갔는데..

바에 훤칠한 금발청년이 환한 미소로 맞아주길래 친구는 맥주, 나는 무알콜이 필요한데 가능하냐고 했더니 그럼 당연하지! 하며 앉고 싶은데 앉으라고..

생맥주 종류에 대해서 친절히 설명해주고 제 커피를 만들어주는 동안 공부해온 노르웨이어를 말했더니 우와~ 잘한다며 비행기를..ㅎㅎ 자기는 여기 살지만 독일에서 태어났고 노르웨이어도 꽤 하지만 아직도 배울게 많다고.. 제가 한 말에 노르웨이어로 대꾸해주며 어찌나 기분좋게 해주던지.. 걸어다니는 다비드상 같은 청년이 활짝 웃고 다니니 술을 안 마셔도 마구 취하더라는 ㅎㅎ

그 외에도 페로 산도이 섬에서 끝내주는 치킨슾을 만들어준 카페 여주인과 수다떨며 한국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오슬로 서점 주인과 한강 작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앞서 말한 스볼베르 펍에서 옆자리 앉았던 부부와 3일 내내 가는 곳마다 마주쳐서 어느새 만나면 반가워하고 이야기 나누고, 마지막날 코펜하겐에 들렸을 때 전철타고 나가 뉘하운 운하 옆 식당에서 감탄을 자아내는 홍합탕을 먹는데 거기서 서빙한 금발의 덴마크 청년의 시크함( 시크하나 할말은 다하고 한국음식 먹어봤다는 자랑까지..) 과 햇님같은 눈부심 (2미터 될듯한 키라서 테이블에 앉고나서 주문하려고 그를 쳐다보면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금발 속 얼굴이 텔레토비의 동산 위 햇님처럼 빛남 ㅎㅎ), 호들갑스러우면서 기분좋은 서빙에 두팔로 two thumbs up! 해주면서 "팔이 열개쯤 있었으면..(더 많이 해줄텐데)"라는 제 칭찬에 뒤로 넘어가며 좋아하던 브라질 청년... 노르웨이 산에 트래킹 갔다가 혼자 올라간 정상에서 갑작스레 낀 안개에 사방이 안보여 순간 공포를 느끼다 옆에 나타난 이탈리안 가족들을 보고 넘 반가워 나 지금 무섭다, 같이 있어도 되겠냐고 했더니 오케이하고 안개가 걷힐 때까지 함께하며 저를 안심시켜준 고마운 프란체스카 아줌마, 페로의 바닷가 그림같은 마을 마당에서 와플을 직접 구워 팔던 할아버지 카페에서 커피랑 와플들고 사진찍기 바쁘니 "사진이 중요한가 먹는게 중요하지!"라며 따뜻할 때 얼른 먹으라던 할아버지.. 다들 조용 차분하면서 친절한 가운데 생김새는 엄숙한 바이킹인데 하는 행동은 순둥한 샤이 피플..

아, 퍼핀 새 보러 미키네스 섬에 가는 배에 탔다가 대포카메라를 목에 건 어나더 다비드상인 사진기자를 목격한 후로는 섬에 내려 퍼핀투어를 하는 두어시간의 트래킹 내내 제 눈길은 아름다운 인간을 놔주지 못하고 퍼핀 보랴 어나더 다비드상 보랴 무지 바빴다는건 안 비밀 ㅎㅎ

 

2. 노르웨이어 - 처음 그 말을 배운다고 했을 때 제 아이가 "엄마! 노르웨이 사람들 다 영어 해!!!"라며 고개를 갸우뚱,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짓길래 사춘기 반항아처럼 "알아, 하지만 글은 다 노르웨이어로 써있어. 배워서 직접 읽어볼거야"라며 시작한 공부 

뭐, 시험보고 전공할 것도 아니라서 재미로 시작했고 그거 하나면 노르웨이뿐 아니라 덴마크, 스웨덴, 아이슬란드, 페로말도 겹치는게 많아 일거다득일듯 해서 나름 열심히 했죠 (그래봤자 초보자 수준이지만 ㅎㅎ) 

그래도 이번에 가서 마트 제품들에 써있는 단어들도 알아보고, 쇼핑, 교통편, 크레딧카드로 계산되냐, 커피에 우유 넣어달라, 가게 영업 요일, 탄산수인지 그냥 물인지 등은 말할 수 있어서 뿌듯함과 쾌감이 한번씩 치솟음^^

자기나라 말 공부한다니 좋아하며 노르웨이어 배우는 싸이트를 적어준 사람도 있고..

특히 서점에서의 추억이 많은데 욘 포세야 자국 작가니 당연하지만 한강 작가 책이 대도시도 아닌 북쪽 끄트머리 항구의 동네서점 선반의 황금자리에 떡하니 대여섯 종류가 꽂혀있는걸 보고 놀람(노벨상 수상작가니 당연한건가ㅎㅎ) 

공항서점에서도 제가 욘 포세와 한강의 책을 노르웨이어판으로 찾는다고 하니 눈이 동그래지며 오호~ 한강작가 알지!하며 서점 한가운데로 데려갔는데 베스트셀러 놓이는 자리 한가운데 한가득 쌓여있는걸 보고 애국심 뿜뿜! 서점 주인이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그런 작가가 있는걸.. 그러면서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데 다음 작품이 어떤게 나올지 매우 기대된다고.. 욘 포세 작품은 다음달에 나오니 바로 읽어볼거라고.. 노르웨이에서 사랑받는 한강작가의 책을 보니 기분좋아 채식주의자 노르웨이어판으로 구매! 

노르웨이 사람들 공항 게이트와 배 안에서 책 많이 보더라고요 

확실히 동네 어딜가나 조용조용, 사람들 말 수 적고 여행 내내 전화벨 소리를 못 들음. 저희도 덩달아 속닥거리며 다님. 하지만 옆나라 덴마크 가니 바로 시끌벅적, 전철 안도 길거리도 맥주집 분위기라 귀 아팠음 ㅠ 

 

3. & ... 행복했던 트래킹 - 첫날부터 멋모르고 올라간 로포텐 트래킹의 꽃, 2000 계단의 레이네브링겐 트래킹!

노르웨이 사람들 기술이 안되서 네팔 셸파들이 절벽에 돌로 계단을 쌓은 길인데 계단 높이가 제각각인게 함정ㅠ

키 155인 제가 디디기엔 50센티 계단은 클라이밍 수준이라 네발로 기어올라감.. 중간부터는 빠꾸할 수도 없던 것이 경사가 넘 가팔라서 올라가다 고개만 살짝 돌리면 등 뒤 까마득한 절벽과 저~~밑 바다로 인해 공포감 작렬! 

난간도, 줄도 없고 뒤를 보면 무서워 앞만 보며 한번씩 풀포기 잡고 올라감 (이 나라는 자기 목숨은 자기 책임)

속으로 울면서 중간에 몇번 포기할까도 싶었고 이러다 헛디디면 죽는건가 달달 떨며 터질 것 같은 허벅지 끌고 끝까지 올라갔는데... 와~~ 그 쾌감이란!!!!

거기서 내려다본 섬들은 신들이 노는 무릉도원, 천상세계같은 장관! 빨간 집들은 깨알처럼 보이고 푸른 바다에 널린 초록빛 얼룩의 깎아지른 돌산들.. 그 위를 노니는 하얀 구름

남편에게 전화해서 "여기가 이승인지 저승인지.. 환상이야"했더니 "발 한번 잘못 디디면 바로 저승길이니 맞는 말이네"라고 ㅎㅎ

이후의 트래킹은 고난도 첫경험 덕에 조금은 쉽게 느껴졌지만 매일 쉼없는 걷기로 허벅지는 딴딴~ 날로 건강해짐

2시간마다 배가 꼬르륵거려 한국에서보다 서너배는 많이 먹었지만 어찌나 소화가 잘되던지... 신생아처럼 먹고 화장실가고.. 먹고 화장실가고.. 저녁먹다 옷입은채 기절하고 ㅎㅎ

작년에 페로제도 가셨던 82님의 글처럼 페로는 세상 끝에 선 느낌! 

있는 것이라곤 풀과 바위, 하늘과 바다, 양이 전부인 섬에서 사회적 존재가 아닌 먼지같이 작은 자연의 일부인 저를 보았어요 

노르웨이가 남성적이고 젊고 거친 자연이라면 페로는 그야말로 어머니의 품처럼 푸근하고 따뜻한 자연! 

푸른 목초도 가만 보면 초록풀, 누런풀, 손톱보다 작은 색색의 들꽃이 섞여서 양들에겐 정갈한 산채비빔밥 ㅎㅎ

그곳에 드러누우면 푹신한 초록요에 파란 이불을 덮고 누운 느낌.. 따사로운 햇살에 풀들 살랑이며 제 살을 스치면 "평화~ 평화로다"노래가 절로 나오고... 구름이 흘려가며 섬 하나를 감추었다가 내놓았다가.. 상당히 초현실적.. 한번씩 양들이 메~~하고 울면 아 꿈이 아니구나.. 하게 되는.. 하지만 또 그 섬의 보물인 귀염동이 퍼핀 새들이 흑백의 몸에 빨간 발을 동동 띄우고 파닥이며 슝슝 날아다니면 애니의 한장면인가 싶고.. 

지구의 반을 수박 속처럼 둥그렇게 파내어 거기 들어앉아 있는 느낌! 수박씨의 반의 반의 반도 안되는 나 ㅎㅎ

마지막 일정으로 페로 칼소이 섬 등대 트래킹! 바닷바람 맞으며 벼랑 끝에서 다른 끝까지 가는 능선타고 아슬아슬 트래킹을 했는데 그쯤되니 온 바다가, 온 섬과 지구가 다 내 발 아래 있는 것 같고 집 앞마당 같고 무섭지고 않고 날다람쥐처럼 행복하게 뛰어다녔네요 

 

로포텐 로르부에서의 며칠 - 땅에 반, 바다에 반 걸쳐 지어진 어부의 집 로르부에서 먹고 자며 일출 일몰을 보는건 다른 세계로 순간이동한듯 황홀하기 그지없던 시간

거울같은 바다에 온 세상이 데칼코마니로 반사되어 검은 하늘이 부서지며 시뻘건 태양빛이 새어나오는 모습이 두배가 되고, 아무 소리없는 허공을 갈매기 소리가 얼음깨듯 갈라놓으면 대꾸하듯 창문 아래서 찰박이는 바닷물 소리...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 묻게 되지만 그 순간의 조화로움을 깰까 입 틀어막고 가슴만 쿵쾅쿵광! 

오래되어 못쓰는 나무보트는 풍파에 벗겨진 페인트가 멋짐을 더한채 언덕 풀밭에 무심히 놓여있고, 집 앞 거대한 산봉우리들은 해가 뜰땐 주황색, 한낮엔 초록색, 밤엔 검은 실루엣으로 색을 달리하며 경외감을 일으키고, 밤늦게 그 산 뒤로 해가 넘어가자마자 다시 밝아오르는 하늘을 보며 지금 본게 일몰인가 일출인가 묻게되는 백야의 노르웨이.. 거대한 스케일 속에 귀엽고 짤뚱한 장난감같은 색색의 보트들은 진중한 색감에 생기를 주는 포인트가 되고.. 아름답고 아름다웠어요

 

죽부인 되기 - 온 세상이 고요하고 기껏해야 9명의 주민들만 있는 섬도 있는, 인간보다 자연이 압도하는 곳, 신호등도 없고 저멀리 코딱지만한 차 한대 지나가는게 겨우 보이는 그런 곳에서 오직 하늘, 바람, 구름, 바다, 햇살만 느끼며 오염되지 않은 공기와 물을 마시며 마냥 걷고, 달고 시원한 청과와 구수하고 담백한 누런 빵과 고소한 치즈와 요거트로 배채운 시간들은 '천연 해독의 시간'이었어요 

자연을 거스를 수 없는, 그래서 순응하는 사람들, 그들이 가진 것만으로도 다 가져서 섬 밖에 나갈 필요를 못 느낀다는 사람들, 겨울이면 배가 끊기고 몇달을 베어놓은 풀로 양 먹이고 말린 양고기와 치즈, 한번씩 헬기로 배달되는 식료품으로 살아가도 만족하는 사람들을 보며 같은 지구에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했네요 

온갖 시각적 청각적 자극과 욕망과 탐욕에 이리저리 낚아채이고 너덜해지는 생활을 하다가 그곳에 가 있는 동안은 평화와 자유로움, 비움이 주는 개운함을 느끼는, 그래서 더 가득 채워짐을 경험한 여행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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