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에 관한 책을 번역하신 분의 글인데, 책 소개하려고 가져 온 게 아니고 글 자체가 너무 감동이라서 옮겨봅니다.
저도 우리 곁에 있다가 떠난 녀석 생각에 눈물 조금 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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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철
링컨은 가장 어둡고 힘든 순간에 우리 가족이 되었다.
큰 애는 서울에서 심층 정신치료를 받으며 자꾸 흩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그러모았다. 나는 그런 아이를 뒷바라지하느라 밴쿠버 집을 떠나 8개월째 친척에게 신세를 지고 있었다. 둘째는 토론토에서 춥고 외로운 대학 신입생 시절을 견뎠다.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던 막내 역시 불안감을 속으로 삭이고 있었으리라. 모든 혼란의 가운데서 굳건히 닻을 내리고 중심을 잡는 사람은 아내였다.
그의 차분한 낙관과 흔들리지 않는 의지가 없었다면 우리는 무지막지한 폭풍 속에서 이리저리 나부끼다 깨지고 부서져 흔적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날 전화를 받을 때까지는 몰랐다. 그런 아내조차 마음을 붙들어줄 뭔가가 필요했다는 걸.
“여보, 개를 한 마리 들이면 안 될까?”
나는 개를 싫어하는 데다, 반대할 이유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렇지 않아도 삶은 복잡했다.
왜 지저분하고 냄새 나고 시끄러운 녀석을 더한단 말인가? 이민 생활은 늘 돈에 쪼들렸다. 왜 사올 때 몇 천불의 목돈을 지출하고, 사료비에 간식비에 보험료에 수의사 비용까지 지불한단 말인가? 그때는 무엇 하나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왜 천방지축 통제할 수 없는 존재를 추가한단 말인가?
물론 아내도 알았다. 그럼에도 뿔뿔이 흩어져 기약 없이 고통을 견디는 시간이 너무 길고 춥다 했다.
개가 있으면 집안에 훈기를 더하고 잠시나마 시름을 잊은 채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개라… 개가 있으면 정말 그럴까?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지만, 아내에게 도움이 된다면 양보할 수 있었다.
“그래, 그럼 너무 크지 않은 놈으로, 아니 아주 작은 녀석으로 알아봐요.” 며칠 후 카톡으로 찹쌀떡만 한 강아지 사진이 한 장 날아왔다. ‘허, 고 녀석! 귀엽긴 귀엽네.’
그러나 캐나다 집에 돌아온 순간, 나는 놀라 자빠질 뻔했다. 송아지만 한 털북숭이 네발짐승이 거실을 어슬렁대고 있었다. 찹쌀떡이 몇 개월 만에 성견 크기로 자란 것이다.
몸무게 35킬로그램이 넘는 골든리트리버는 다루기 버거웠다. 개는 철이 없었고, 우리는 경험이 없었다. 뭘 먹여야 하는지, 어떻게 재워야 하는지, 어떤 보상과 벌을 줘야 하는지를 두고 각자 의견이 달랐다. 그러나 개와 함께 자연의 품에 안기는 순간 모든 문제가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다람쥐를 본 녀석은 흥분에 몸을 떨며 뒤를 쫓아 질주하다가, 어느 틈엔가 개울물에 첨벙 뛰어드는가 하면, 무슨 냄새를 맡는지 코를 허공에 쳐들고 벌름거리다 가파른 언덕배기를 쏜살같이 내달렸다. 그 푸르른 생명력, 천진한 몰입, 기쁨과 놀라움과 흥분과 좌절을 감추지 않는 단순함은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 거기 취해 함께 뒹굴고 웃음을 터뜨리다보면 세상일이 죄다 하찮게 여겨졌다. 어느날 문득 깨달았다. 우리가 개를 키우는 게 아니라, 개가 우리를 치유하고 있음을.
영어 동사 ‘retrieve’는 ‘되찾아오다, 회수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리트리버란 ‘사냥감을 찾아서 물어 오는 개’를 가리킨다. 링컨은 전혀 딴판이었다.
공이나 나무막대를 던지면 잘 찾지 못했고, 어쩌다 물어와도 좀처럼 건네주지 않았다. 리트리버는 타고난 수영선수라는데, 링컨은 물을 좋아하면서도 수영은 절대 하지 않았다. 리트리버는 소위 세 가지 머리 좋은 견종에 든다는데, 그리 영리한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녀석의 좋은 점을 발견했다. 무엇보다 링컨은 무척 점잖았다. 장난감을 두고 다툴 일이 있으면 다른 개에게 양보하고 물러섰다.
어지간한 일에는 수선 떨지 않고 침착했으며, 평소에도 조용한 곳에서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멀리 여행을 갔다 돌아오면 어찌나 반가워하는지 링컨을 볼 생각에 마음이 부풀곤 했다.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쓰다듬거나 먹을 것을 주면 공손한 태도로 예의를 차렸다.
사람으로 치면 점잖은 내향인이랄까. 세상사에 화가 나고 좌절하다가도 링컨의 차분한 눈망울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절로 가라앉았다.
무엇보다 링컨과 함께 살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개의 의중을 알게 되고, 취향과 버릇에 익숙해지자 녀석이 개성을 지닌 독립적인 존재라는 사실이 사무쳤다. 그런데 집 근처 숲에서 사슴이나 새를 볼 때도, 코스타리카의 우림에서 나무늘보를 볼 때도, 심지어 TV 다큐멘터리에서 맹수를 볼 때도 그들의 눈빛에서 링컨이 보였다.
우리는 단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감정과 의지와 개성을 지닌 존재들과 어울려 산다는 생각이 비로소 머리를 떠나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개의 수명은 다양하지만, 대개 10~15년 정도다.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이 대부분 이별의 슬픔을 겪는다는 뜻이다.
우리에게도 그 순간은 어김없이 다가왔다. 재작년 크리스마스에 링컨의 고개가 자꾸 한쪽으로 기우는 것이 눈에 띄었다. 병명은 뇌종양. 뇌간 가까이 있어 수술은 못하고,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몇 개월은 일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지만, 고용량 스테로이드를 길게 쓴 탓인지 피부 여기저기에 궤양이 생기고, 수시로 코피를 흘렸다. 더 버티기 어려웠다. 평소 링컨을 예뻐하던 분들께 연락해 바다 풍경이 아름다운 공원에서 작별 파티를 열었다. 모두 마음에서 우러나온 인사를 건네며, 링컨과의 추억을 회상했다. 마지막 산책, 마지막 식사, 마지막 간식, 그리고 안락사 직전 작별 인사를 건네기까지 링컨은 시종 늠름하고 의젓하게 품위를 지켰다. 가족에게 둘러싸인 채 뒷뜰 잔디 위에 평화롭게 누워 주사를 맞고 눈빛이 가물가물 멀어져 갈 때, 녀석의 귀에 대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잘 가라, 링컨. 내 아들아. 우리를 찾아와줘서 정말 고맙다. 언젠가 꼭 다시 만나자.”
링컨을 보내고 헛헛한 마음을 어찌할 바 모르던 차에 이 책의 번역을 의뢰받았다.
개에 관한 책이 아니었다면 물리쳤겠지만, 일단 옮기기 시작하자 이내 책 속에 빠져들었다. 무엇보다 내가 링컨을 키우며 직접 배우고 느낀 것들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책을 슈퍼베스트셀러 자리에 올려 놓은 두 저자는 진화심리학자로 개를 훌륭하게 키우는 방법을 연구한다. 사람을 돕는 보조견을 더 많이 양성하기 위해서다. 그 방법은 재미있게도 명문 듀크대학교 내에 ‘강아지 유치원’을 여는 것이었다. 그들은 연구팀의 헌신적인 노력과 대학 공동체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훈련받지 않은 강아지를 평가하는 표준화된 도구를 개발한다. 기질, 자제력, 기억력, 사회적 인지, 신체적 인지 등의 항목을 평가해 어떤 개가 자라서 훌륭한 보조견이 될 것인지 미리 알아보고자 한 것이다.
그들이 치명적으로 귀여운 강아지들과 함께 생활하며(책에 실린 사진들을 보라!) 밝힌 사실은 개는 물론 인간의 인지와 행동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훌륭한 보조견이 되려면 타고난 재능이 중요할까, 교육이 중요할까? 교육 시기도 중요할까? 부모의 양육 방식에 따라 각기 다른 재능과 행동 양식이 나타날까? 이런 질문은 우리가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저자들이 얻은 가장 중요한 교훈은 ‘모든 개는 다르다’라는 것이었다.
모든 개는 수많은 특성이 각기 독립적으로 나타나며, 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합이 독특한 개성을 형성한다. ‘골든리트리버는 친절하고, 셰퍼드는 용맹하며, 핏불은 사납다’와 같은 소위 ‘견종의 특성’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피부색으로, 지역과 학교로, 성별로, 성적 지향으로, 그 밖에도 온갖 잣대로 편을 가르고 배제하는 우리를 돌아보게 만드는 결론이 아닐 수 없다.
모든 개가 개성을 지닌 독립자라면, 나아가 내가 링컨을 통해 보고 느꼈듯 모든 동물이 그런 존재라면 인류는 우월한 능력을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함부로 휘두를 것이 아니라 각기 유일한 존재인 생명을 최대한 배려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 또한 명백하다.
눈이 확 뜨이는 과학적 발견과 함께 심오한 통찰을 선사하는 앞부분이 지나면 책은 다시 한번 놀라운 선물을 안겨준다. 실용서로 변신해 강아지를 훌륭한 개로 키우는 실질적 요령을 일러주는 것이다.
개를 재우는 요령, 대소변 가리기, 산책시키는 방법, 무엇을 먹일 것인가, 심지어 설사에 대처하는 방법과 하루 일정표까지 제시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개를 키우면서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아무 때나 짖고, 가구를 물어뜯는 행동에 좌절한다. 개를 미워하고, 심지어 버리기도 한다. 개는 물론 사람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책의 뒷부분은 개의 행동을 교정할 길을 찾는 사람, 곧 개를 입양할 초보 강아지 부모에게 단비 같은 정보가 될 것이다. 고백하자면 나도 링컨을 이렇게 키웠더라면 하고 아쉬워한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충직하고 사랑스러운 개를 만나는 것은 삶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 중 하나다.
개는 외로울 때 친구가 되고, 슬플 때 위로가 되며, 언제나 다정하게 말을 건다. 마음을 어루만지고, 상처를 치유하며, 우리 자신을 더 깊게 들여다볼 거울이 되기도 한다. 이 책은 개에 관한 책이지만, 우리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개를 키우는 모든 분께, 앞으로 개를 키우려는 모든 분께, 그리고 친구가 필요한 모든 분께 또 하나의 선물이 되기를 바란다.
2025년 여름 한복판에
내 곁을 떠난 친구를 생각하며
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