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저, 50년이면 많이 살았네요

도대체 왜 존재하는지 하늘이 원망스러웠던 아버지도 56세에 돌아가셨어요.

고질적인 혈관질환이 있었는데 관리하는 걸 안하시고, 계속 바람피우며 엄마의 신용카드까지 써서 은행거래를 막았던 그런 사람이었어요. 잘 생긴 외모에 세상 규칙을 밥먹듯 어기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제 손엔 자동차 범칙금 영수증이 두툼하게 들려있었어요.

 

저와 19살 차이나는 엄마는 그저 해맑은 사람이에요. 22살에 애 셋 딸린 홀아비에게 넘어가 자기 자식까지 넷을 건사하느라 힘들었죠.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아버지와는 반대로 너무나 정확하고 깔끔한 분인데, 그 성격탓에 세 남매가 좀 힘들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어린나이에 도시락을 8개씩 싸면서, 집안을 반들하게 유지하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싶어요. 아버지의 바람에 엄마는 제가 두돌이 지났을 때 이혼하신 것 같아요. 저는 그분과 연락한 적이 없고 오빠가 오래전에 했던 것 같아요. 아직 혼자 사시는데, 형편이 녹록치 않은 듯 싶고요.

 

저는 형제들 중에 공부도 잘 하는 편이었고 학위도 마쳤습니다. 좋은 곳에서 일했고 너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고 아이는, 없습니다. 둘이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연말에 일을 잃고 하던 일도 안풀리며 심한 우울을 겪었습니다. 아버지를 보고 자란 저는 길에 휴지하나 버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갱년기와 우울증이 겹쳐 '도벽'이라는 게 생겼어요. 습관성은 아니고 몇회, 근데 그게 CCTV에 잡혔고 저는 경찰에 넘겨졌습니다. 그동안 했던걸 모두 잡아내겠다며 업체는 합의해주지 않는 상황이고 어쨌든 저는... 그런 상태로 있습니다.

 

경찰서에 다녀온 날은 머리가 멍했지만, 저는 이제 알 것 같습니다.

그토록 금기시 했던 본능이 터져나오고, 나는 아버지의 딸이라는 무의식의 그늘이 튀어나오면서 더이상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문명의 공동체에 맞지 않는 사람인 것이죠. 절도는 용서해서는 안되는 범죄이니까 아마 형사재판에 넘겨질 것이고 판결이 나오겠지만...

 

저는 이제 그만 살고 싶습니다. 

이건 작년부터 계속 해왔던 생각입니다. 생, 세상에 대한 미련은 완전히 닳았고 다만, 남편이 받을 충격이 걱정되긴 하지만, 그 충격에 대한 우려도 저의 살고자하는 실오라기같은 집착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봅니다. 산 사람은 다 살게 되어 있고, 그 순간들은 다 지나가니까요.

 

그 순간은 다 지나가고,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그렇기에 저는 더이상 미련이 없습니다. 지푸라기같은 미련이 남아 여기에, 가장 안전한 익명게시판에, 제 노트가 아닌 이곳에 누군가 한두명이라도 읽어주길 바라며 이 글을 쓰는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지 저도 압니다. 

그러나 저는 더이상 존재할 가치도, 의욕도, 이유도 느끼지 못합니다. 생각해둔 방법들을 실행하여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자식이 없다는 일이 그나마 얼마나 다행일까요.

 

사흘간 열심히 제 흔적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언제가 스러질 육신을 제 의지로 정리한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차가워지는 기분이 들어요. 세상의 시스템과 조직 안에서 저는 글렀습니다. 이탈자는 굴레 밖으로 튕겨져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제 자신과 세상을 지키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잠든 남편을 여러번 안아주려고 합니다. 세상 도덕에 철저한 이 사람에게 이런 부인은... 굉장한 충격과 부끄러움으로 이어지겠지요. 이기적인 저는 그의 그런 외면을 받는 일도 큰 이유가 됩니다. 다른 가족들은 지웠지만 끝내 남편이 걸립니다. 생과 사의 사이에 가장 큰 존재감이 있는 사람입니다.

 

50년이나 세상을 보았으면 이것으로 되었다는 생각도 들고요. 쾌적한 기분으로 떠나고 싶지만, 모두 저의 과보겠지요. 저는 정말 잘못했고, 잘 못 살았습니다.

 

세상 복잡한 요즘, 이런글은 죄송합니다.

제 자신의 마지막 존엄을 지키고 싶습니다.  

 

(아마 이글은.. 잠시 후에 삭제할 듯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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