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문생(장남), 안준생(차남), 안현생(딸)
장남 안문생은..
어릴 때 길가에서 누가 준 과자를 먹고 사망..
그 후 어머니가 차남 안준생 데리고
중국 상해에서 망명생활..
프랑스인 천주교 신부에게 맡긴 딸은
나중에 상해로,
임시정부 상해에서 떠나도
작은 아들 가족, 딸사위와 함께
상해에서 계속 살음..
차남 안준생은..
4살때 아버지 여의고.. 형도 잃고..
일본이 점령한 상해에서
취직도 못하고 가난하고 어렵게 살다
일본 회유와 압박으로..
(이토 히로부미 아들에게 사죄 강요)
매국노, 불효자식 소리 듣고..
해방 후 한국에서 숨어지내다
625 전쟁중 51년 폐결핵으로 사망..
이후 안준생 일가는 미국으로..
안현생은..
피난처 대구, 효성여대(대구 카톨릭대 전신)
불문과 교수 3년 재직
추후 서울로 거처 옮김..
결혼은 했지만 자식 유무는 안나옴..
미국으로 건너간 안준생 일가는
안중근 며느리,
안웅호(장남), 안연호(장녀), 안선호(차녀)
손주 안웅호 자녀들
증손주 안도용, 캐런 안, 리사 안
미국인 손주들로 대가 이어지는 듯..
안귀령은 같은 순흥 안씨
이토 히로부미 사살한 댓가로
유해도 없는 안중근 의사님..
(일본 신사 계단, 통로에 흩뿌려졌다고..
사후에도 일본인들이 밟아주라고.. ㅡ,ㅡ)
포함 많은 독립운동가들 덕분에
지금의 한국이 있어 정말 감사합니다.
근데 안타까운게
안중근도 기득권이었어요..
임진왜란 당시는
기득권 양반과 백성들이 힘을 합쳐
조선인이라면 모두가 왜국에 대항했지만
동학농민혁명은
계급간의 갈등도 섞여있었기에
같은 조선인끼리 화합하지 못했어요..
지배 계층 수탈에 대한 프랑스 대혁명 급의
시민 봉기이기도 했지만
일본의 침략에 반대하는 반침략 운동적 성격이
훨씬 컸어요
동학농민혁명 일어난 배경은
1876년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
개항 이후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항한
조선의 방곡령(일본으로 곡식 유출 금지)에 대한
일본의 손해배상 청구에 속수무책인
지배계층 수탈
1892년 조병갑 고부군수 부임
강화도 조약, 일본의 경제 침략 이후 19년 후인
1894년 갑오년
일본군의 경복궁 침탈이 도화선인
동학농민혁명..
얼마나 민주적이었는지
자치기구였던 집강소 등을 봐도 나타나죠.
하지만 왕정시대였기에
민주 정신은 처절하게 차단되었습니다..
외세, 일본 군대까지 끌여들여 백성들 죽인
지배계층의 진압으로 실실했고요.
혁명군 토벌을 담당한 민병대에
16세 유부남 안중근이 대활약을 하고요..
그 당시 기득권이었던 안중근에게도
조선인은 양반만이었던거죠..
안타까운 역사..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침탈 당했음에도
일본군에게 백성들 처단을 맡긴
왕가의 굴욕적인 오만..
작금의 현실과 다르지 않습니다..
안중근 의사님 엔딩도..
안중근 일가가 당시 어렵게 살았던것도..
한국 역사가 일본에 핍박받은건
임진왜란부터 에요..
겉으로만 승리한 임진왜란..
처절하게 골병 들었던 한국 대신..
일본은 한국 문화유산 흡수로
그때부터 장족의 발전했고, 발복했죠..
여전히 한국을 본토화해
대륙 정복 꿈을 이루려는 일본 지배층,
쇼군들의 후예가 일본 내각제 의원들.
이미 과학적으로 예견된
금년 여름, 일본 영토 일부 침몰.. 때문에도
내란 세력, 극우, 기득권들에게
일본 잽머니가 현재도 뿌려지고 있을거라
추론됩니다.
그간 미국 진영 상관없이
미국인사들에게 뿌린 잽머니도 엄청나고요
현재도 82에서
중국이 문제다
이 얘기가 계속 나오는 이유랍니다.
그래서 전 일본이 아직도 여전히 싫어요.
친일, 국가 반란 내란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요
내란수괴 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