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20대 때 사귀던 남자가 있었는데 결혼하겠다고 마음 먹기에는 여러가지 조건이 너무 안 좋았어요. 학벌좋고 인물 괜찮은데 직장 불안정, 벌어놓은 돈 없고, 나이차 많고, 시댁 노후대책 안 되어 있고요. 성격은 잘 맞는다기 보다 저한테 맞추려고 많이 노력하는 편이었고 절 많이 좋아했어요.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남자가 부모님을 찾아뵙고 결혼 허락해 달라고, 제가 말려도 막무가내였어요.
마음 약한 부모님이 바로 내치시지 못하고 가족회의를 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완전 코미디. 제일 목소리 큰 이모가 저한테 물었어요. 너도 이 남자랑 결혼하고 싶어? 뭐가 좋은데? 그래서 저는, 사귀기 전에 일 관계로 제가 자취하는 근처에서 늦게 끝났는데 동료들이 모텔을 잡겠다고 하길래 그냥 우리집 거실에서 재워 줄수 있다고 한 적 있어요. 저혼자 침실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 나가보니 다들 바닥에 널부러져 자고 있는데 이 남자는 자기가 입었던 옷을 예쁘게 머리맡에 접어놓고 여분으로 가져온 옷을 갈아입고 단정하게 자고 있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은 뭔가 어른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도 괜찮을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서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고 대답했더니요. 이모가 등짝 스메싱을 하면서, 그거 다 쇼지, 그런걸 믿냐? 얘가 너무 순진하네 ㅉㅉㅉ 저는 이모한테 속고만 사셨냐고 그런걸 쇼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냐고 했더니 다 그런다는 거예요. 이모부도 세상 무뚝뚝한 경상도 싸나이인데 결혼전 데이트 할 때 바람이 많이 부니까 갑자기 어느 가게에 들어가서 스카프를 하나 사다가 머리에 씌어줬다고. 그 후로 결혼해서 50년 살면서 스카프는 커녕 손수건 한장 선물한 적 없다고. 아마 그 때 누군가 코치를 받았던 모양인데 이모는 그게 너무 낭만적이라고 빠져들었다는 거예요. 완전 츤데레인줄 알았는데 결혼하고 보니 그냥 무관심.
과연 이모말대로 저도 결혼해서 살아보니 입었던 옷 접어놓고 반듯하게 누워 자던 그 남자는 어디에 갔는지. 매일 입었던 옷은 누에고치 허물벗듯 바닥에 싸질러 놓고 양말은 벗으면 방 구석구석 던져 놓고 책상에 앉아서 코풀면 바로 옆에 있는 휴지통에 조준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방바닥에 버리는 개망나니더라고요. 남들 다 그렇게 결혼전엔 쇼하나요, 아님 저만 바보같이 속은 거였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