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길어요 ^^ 저란 사람 수다쟁이 인정!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5060 친구들도 안녕?
올 1월, 박식한 82님들 덕분에 책의 세계에 인도되어 책 속에 발 푹 담그고 슬기로운 독서 생활을 하며 사는 이야기도 몇번 올리고 했는데 벌써 11월이네요 @@
사실 시간이라는게 멀리서 보면 탄생일부터 죽는 날까지 한덩어리지만 달력이라는 것에 맞춰 살다보니 사계절의 나라에서 지금은 계획을 세우고 일을 벌이기 보다는 마무리에 접어들기 적합한 시기처럼 느껴지죠
그러나 그런 시간의 틀에서 나를 돌아본다는 뜻의 마무리라는 말은 어울리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은 어느 때든 시작하고 즐기면 된다는 사고의 자유로움과 여유가 생기는 것이 나이든다는 것의 좋은 점이 아닐까 해요
짧고 굵은 올 가을, 제가 사랑에 빠진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좀 나눠볼게요
사랑에 빠지다 I
아빠가 돌아가시고 치매 엄마와 함께 산지 3년 반, 엄마가 해주신 것이 너무 많아 당연하다 생각하며 모시기 시작했지만 누구나 짐작하듯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어쩌지 못해 공황발작까지 일으키며 119도 불렀던 시절도 지나고 ㅎㅎ 이제는 데이케어에 나가시는 엄마만의 규칙적인 일상이 생기니 저도 그에 맞춰 저만의 시간도 갖고 부딪힐 만한 일은 요리조리 싹싹 피하는 요령도 생겨서 매우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어요 ^^
그런데 지난 여름, 너무나 매끄럽게 흘러가던 관계가 심심했던지 엄마가 매일 던지지만 더이상 안 걸리는 낚시줄에 걸려 선을 넘고 감정배틀을 하게 되었고 나만 왜 이러고 사나 하는 생각이 잠깐 들어 해외여행을 결심했죠
엄마와 떨어져있는 시간이 필요했고 저도 다른데에 시선을 돌리며 여행하고 나면 엄마나 저나 서로 좋을거란 생각에... 돈벌어서 이럴 때 써야지 하며 노르웨이를 갔는데 인생 여행을 하고 왔어요 ^^
여행 장소에 관한 만족과 추억은 순전히 개인 취향인데 저에게 노르웨이는 다니는 내내 입 밖에 함부로 내기는 조심스러운 말이 마음 속에 떠오르는 여행지였어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라는
누가 보기엔 끝없이 보이는 피요르의 고요하나 깊은 바닷물과 1000미터는 기본인 거대하고 높은 산들, 뜨문뜨문 흩어진 집들 말고는 볼 것이 없다고도 하는데 저에겐 눈이 번쩍 뜨이는 나라였어요
한국같은 경우 날씨로 인한 수해가 잦아서 물가에 집을 짓는 일이 거의 없는데 그 깊고 넓은 바닷물 찰싹대는 바로 그 물가에 쪼르르 지어진 집들도 신기했고, 눈들어 보면 내 시야는 하늘과 높은 산 딱 둘로 나눠지는 그 땅이 신기했고, 천미터 산꼭대기에서 우당탕쿵탕 천둥소리를 내며 하얗게 부서지는 폭포들의 포말과 귀를 때리는 소리가 신기했고, 한국같으면 그런 폭포 하나면 사람들이 바글거리며 모여들었을텐데 그런 폭포가 널려있어도 구경하는 사람이 어쩌다 한두명 있거나 아예 없는 경우가 태반인 것이 신기했고, 가구 수가 매우 적은 동네들 사이사이에 시냇물도 흐르고 집 옆 작은 계곡에도 물길이 흐르는데 잔잔하고 투명한 물색의 물은 보기 힘들고 다들 땅에서 솟구쳐 넘치는 물을 주체 못하듯 콸콸 하얀 포말 가득한 엄청난 수량의 물들이 뿜어져 넘치듯 흐르는 모습이 신기했고, 간간이 보이는 집들도 지붕 위에 풀을 덮은 모습이 집조차 자연의 일부인양, 잡초같고 곰팡이처럼 토지의 일부인양 자연스럽게 섞이 모습이 신기했어요
특히, 보이는 지형이라고는 높은 산과 넓은 피요르, 갈색 땅 뿐인데 시시각각 변하는 그곳 날씨가 그 단순한 배경을 휘황찬란한 그림들로 계속 바꾸어나간다는 것이 신기했어요
회색 구름이 잔뜩 껴있다가 비가 내리고 온 세상이 검은 회색으로 덮여 수묵화 같다가도 해가 쨍 나면서 거대한 산들 위로 더 거대한 쌍무지개가 뜨면 세상은 8k 고화질 컬러화면으로 싹 바뀌고, 어디선가 양떼 구름이 몰려와 산을 덮고 집을 덮으면 여기가 지상인가 천상인가 하게 되고, 산자락의 사과나무 밭을 걸으면 빨간 방울 장식을 한 크리스마스 트리들 사이를 걷는 듯하고, 양떼들이 양떼 구름 밑에서 평화롭게 풀뜯는 옆을 지나가도 저는 아랑곳 없이 자기 할 일 하며 풀뜯는 모습을 보면 저는 양떼를 그린 대형 그림 액자 옆을 지나가는 기분?
저녁을 먹고 밖에 나가면 사람도 없고, 가정집에서 키우는 개도 없고, 길가 들짐승도 없고, 벌레조차 안보여 길에 있는 생명체라고는 저 하나 밖에 없는 넓고 황량하기까지 한 길을 마냥 걷다보면, 어둠이 내려앉고 검은 하늘 밑 더 검은 땅에 서 있으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곳은 마치 지구가 아닌 화성이나 금성, 달나라에 와있는 기분?
밤에 자다가 너무 환해서 벌써 아침인가 하고 보니 달이 숙소 창 안에 딱 들어맞아 달빛을 한가득 비춰주고 있어서 일어나 창을 여니 100프로 무공해 산소가 밀려들어와 흡~흡~ 들이마시며 여기선 많이 마셔주는게 남는거라고 혼잣말 ㅎㅎ
열심히 청정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달빛 샤워를 받다가 배가 불러 하늘을 보니 헉.. 하늘에 별이 꽉 차있는걸 목도하고 새벽 2시에 밖으로 뛰쳐나감
내가 아는 모든 별자리와 그 뒤에 가득 깔린 별들, 별들,...
한밤중이지만 그리 어둡지 않은 별이 빛나는 밤, 어릴 적 아빠가 사다주신 북유럽 동화집에 나오던 단순한 모양의 집과 가문비 나무와 달과 별이 있는 그곳에 제가 가 있더라고요 @@
그렇게 흥분된 상태로 몇시간 못자고 일어나 일출을 맞으러 나가 걸으면 처음엔 검게만 보이던 세상에 나무도 나타나고 멀리 호수도 생기고 더 멀리 산맥도 솟아오르고 별장으로 쓰는지 사람이 없는 집들도 하나둘 눈에 들어와요
아주 조금씩 하늘색이 바뀌며 해가 산자락에 가까이 올라옴을 느끼며 걸을 땐 이 지구에 저 혼자만 있는 느낌이 들었는데 평생 잊지못할 순간입니다
그렇게 걷다보니 땅에는 육무가 깔리고 하늘에 가로로 길게 밧줄처럼 걸쳐진 검은 회색 구름 뒤로 붉은 띠 구름이 한줄 걸쳐지고, 중간중간 새끼꼬듯 회색과 붉은 구름이 한번씩 교차하며 가문비숲의 실루엣 위에 평행으로 오묘하고 신비롭게 겹겹이 놓인 하늘은 뭉크의 절규 그림 속 핏빛 하늘 그대로였어요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워서 보고 또 보고.. 보면서 믿기지 않고.. 육무가 사라지고 하늘도 하늘색을 되찾은 후에야 자리를 떠서 숙소로 걸어갔죠
매일 그렇게 일출과 일몰을 보며 감격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에 흥분하며, 기름기 쏙빠진 노르웨이 고기조차 노르웨이스럽게 맛있고, 땅콩버터 말린건줄 알고 먹은 브라운 치즈 맛에 반해 최대음식이 하나 추가되고, Å,Ø,Æ,å,ø,æ 와 같은 글자를 보니 이건 이국적인 분위기를 넘어 외계스런 분위기의 나라이고, 무엇보다 인간의 영역 밖의 거대한 자연 속에 살아가려면 그냥 자연에 순응하고 복종하며 살 수 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노르웨이라는 나라에 깊은 관심이 생겼어요
그래서 여름에 다녀온 여행이지만 세달째 앉으나 서나 노르웨이 생각에 빠져 살아요 ㅎㅎ
여행 사진 들여다보는 것으로 모자라 노르웨이 책을 찾아보다가 욘 포세라는 작가 책을 빌려왔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작년 노벨문학상을 탄 작가라네요 ^^ (올해 한강 작가님 노벨상 수상까지 완전 읽을거리 넘치는 가을~)
그런데 이분의 글들은 제가 처음 접해본 스타일이면서 (제가 그리 많은 책을 읽지 않아서..) 묘하면서 치명적인 매력이 있어서 언뜻 줄거리나 사건 사고가 전혀 없는 글인데도 파도가 들어왔다 나갔다 하듯, 도돌이표 후렴구를 끊임없이 부르듯,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하다보면 시간가듯 넋놓고 읽다보면 어느새 강가에 있던 내가 강물에 들어가 완전히 잠기고 팔다리 힘빼고 물결에 몸 맡기고 둥둥 떠가다 어느 순간 바다 한가운데임을 알고 전율을 느끼는 것 같다고 할까...매우 신기하고 묘함
문장도 인물도 스토리도 완전 미니멀리즘!
읽다보면 내가 그 등장인물의 껍데기를 쓰고 그 사람이 되어 글 속에서 살아가는 착각!
아침 그리고 저녁
멜랑콜리아 I, II (여기의 파트 II 는 늙음과 치매에 대한 책 중에 최고!!!)
3부작
샤이닝
저 사람은 알레스
보트하우스
기타맨
가을날의 꿈
오누이
Septology
이번에 읽은 책들인데 구체적인 특정인이 아닌 인간 자체의 모습, 그런 인간들 간의 관계에 관하여 수식과 꾸밈은 다 걷어내고 알맹이만 다룬 매혹적인 글에 빠져 번역되어 나온 책, 동화책까지 다 읽고 미번역본은 영어판으로 구해서 읽고 있어요
그것도 모자라 노르웨이어도 독학으로 시작해서 매일 아침 한시간씩 온라인으로 공부해요 ㅎㅎ
남편이 저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못말리는 아줌마라고...
노르웨이 글자만 봐도 눈이 번쩍 뜨이고, 어디서 노르웨이나 오슬로 소리만 들어도 귀가 쫑긋서는 저는 60이 코앞인 나이에 이렇게 가슴뛰고 설레이는게 생겼다는 것만으로 행복합니다 ~~~~~~
누군가를, 무언가를 사랑하게 되면 더 알고 싶고 더 보고싶어 한다는 말이 맞아요 ^^
그리하여, 저의 노르웨이 여행은 한국 와서도, 방구석에서도 계속 '진행 중'입니다
그리고 다음 목표도 생겼어요
하얀 눈에서 뒤구르고 시린 공기를 몸에 가득 채우고 별 가득한 하늘과 눈덮힌 하얀 산들이 피요르 바닷물에 거울처럼 비치는 모습을 보는거요
겉모습은 거대한 바이킹족이나 속은 낯도 가리고 순하고 비교나 경쟁과는 거리가 멀게 자기 자리에서 살아가는 노르웨이 사람들과 노르웨이어 몇마디 나눠보는거요
여행갔을 때 친절하기 그지없는 노르웨이 기사분과 친해져서 여행 내내 이야기도 많이 하고 노르웨이에 대해서도 듣고 아주 즐겁게 지냈거든요
제가 거대한 자연과 우주 앞에 한낱 작은 인간이라는 걸 피부로 느끼게 해주는 그곳이 좋아요
사람이 우선이고 사람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시끄럽고 복잡한 세상에 살다보니 자연은 자연같고 사람은 사람같은 곳이 마음에 들어오네요
수다인만큼 말 나오는대로 떠든 점 이해해 주시고요 ^^ 실은 사랑에 빠진 이야기가 더 있는데 넘 길어져서 여기서 그만~
가을의 막바지인데 집앞 단풍도 즐기시고 책도 즐기시고 나만의 조용한 시간도 즐기시며 행복한 주말 보내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