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나이 49
내년이면 50이네요.
반백년을 살았는데 폭삭 삭은 삶 같아요.
(현재 제 상황은 기혼이고 자식은 없습니다.
부모와 왕래도 없어요.)
어릴 때 부모님이 이혼하셨어요.
나르시시스트끼리 만나서 자식 낳고 사는 건
그 자식들에게 엄청난 불행임을
두 사람은 몰랐을까요.
엄마는 감감무소식이고 저는 오빠랑 같이
아빠 밑에서 컸는데 아빠는 바로 재혼했고
동생이 태어났습니다.
위로 오빠 아래로 남동생..
그 시절에 둘째..그리고 여자인 저는
너무 힘들었어요.
이 세상에 좋은 계모는 거의 없습니다.
한 0.1프로 될까요?
동생 낳고 도박에 빠진 계모는 5년 뒤
이혼했어요.
그렇게 세월은 흘러가고...
저는 성인이 되었는데 대입에 실패해서
재수를 하게 됐어요. 살던 곳이 지방이라
서울로 올라가게 됐는데 엄마가 서울에 살더라구요.
연락이 돼서 잠만 엄마에게 신세지고
학원을 1년 다녔어요.
원하는 대학은 아니었지만 합격을 했고
등록금을 내야 하는데 아빠가 안주시더라구요.
엄마에게 가서 신세진 게 괘씸했는지
아님 그 무렵 아빠가 삼혼을 해서 자식은 눈에 안 들어온건지... 그 때부터 경제적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무려 대학을 7년만에 졸업했어요.
한 해 돈 벌고 휴학하고..를 반복..
알바도 어마하게 헸어요.
김밥집에서 김밥말기, 커피숍 알바, 설문지조사, 화장품코너 알바, 마트 판촉 알바...괴외...
근데 참 돈모으기가 어렵더라구요.
그러다 직장에 들어갔는데 좋은 환경은 아니었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다녔습니다.
혼자 독립해서 자취도 하면서... 그래도 참 가난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더군요.
엄마랑 합쳐서 살다가 또 헤어져 독립하다가
반복하다 지금의 남편을 만났어요.
당시 저는 부모와 연끊고 사는 중이었고
그 때 제 눈엔 다정하고 좋은 사람..가진 게 너무 없었지만
저도 가난했기에 둘이 벌면 먹고는 살거라 생각했어요.
이 때 제 나이가 40.. 늦은 나이에 결혼이고
가진 게 없어서 식도 못 올렸어요.
신혼살림은 살면서 장만하고...
가난해도 열심히 일하면 괜찮다 생각하고 투잡하며
하루도 안 쉬고 일했네요.
그러다 코로나가 오고 제가 하는 일에도 지장이 생겨
고민 끝에 작은 가게를 오픈했어요.
3년간 종일 가게에 매달려 일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았어요. 가게 투자한 돈은 고스란히 빚으로..
여태 결혼생활하면서 제가 경제적 가장이었기에
제가 무너지니 가정도 무너지네요.
몇 년간 남편에게 생활비도 못 받고 제가 틈나는대로 알바하거나 갖고 있던 금붙이 팔아서 겨우 이어갔어요.
그러다 제가 건강에 이상이 오고...
더 이상 서울에선 못 버텨서 작년 봄에 지방 대도시로 이사왔습니다.
여기 내려와서 정신적 문제가 생겨 우울증이 왔어요.
알바할 땐 내색없이 하다 결국 못 견디고 8월말에
그만뒀어요.
극심한 우울증의 원인에는 남편도 있는데
제가 현재 처해있는 상황을 모르쇠로 외면하더군요.
함께 같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자 할 줄 알았는데
그건 너의 문제니 네가 해결하라고..
결혼 후 생활비 반반 보태서 꾸리고 모자라면
제가 더 내고.. 가게 오픈 이후엔 제가 가정 경제를 책임졌는데 힘들어지니 외면..이게 너무 크게 배신감으로 오더라구요. 지금처럼 각자 알아서 살자는 그 말에
제가 마음의 상처가 컸나봐요.
죽고 싶단 생각만 계속 들다가 결국 10월 초에
극단적 선택을 했습니다. 죽기 직전 발견돼서
지금은 좀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우울증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네요. 후유증도 크고요.
아무 연고도 없는 지방도시에서 일을 못 구하고
있으니 친구가 서울로 다시 올라와서 같이 있자고
끈질기게 제안했고 저도 환경을 바꾸고자 지금
ktx 타러 가는 버스 안입니다.
캐리어에 짐 좀 싸서 나왔는데
집 현관문 나서는 순간부터 눈물이 쏟아져 나오네요.
남편에겐 서울에서 일자리 구해서 알아서
살겠다 하니 그러라 합니다.
자기 곁에서 정신적으로 좀 나아질 때까지 있으란 말은
끝끝내 안 하네요.
오늘 서울로 올라간다는 메모만 간단히 쓰고
나왔는데 왜이리 눈물이 날까요.
그냥 속상한데 말할 데가 없어서..
82님들 죄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