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내 안의 재미있고 여유있는 부분을 꺼내놓고 싶었고, 싫은 사람 앞에서는 내 안의 미운 마음과 부정적인 말들이 싹트려 하는 것을 감추며 살고 싶었다.
남편의 친구 A 앞에서는 애쓸 필요가 전혀 없었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다른 장소에서 다른 입장에서 그를 만나는 그 누구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와 함께 있으면 많은 것이 편안했고 자연스러웠다.
2년의 투병 끝에 그는 결국 머리까지 침입한 암세포를 이겨내지 못했다.
남편이 나보다 나이가 적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는데, 그의 죽음 후에 놓여진 메모리 카드에 적힌 숫자들을 보니 새삼 참담했다. 아직 40대 중반이라고도 할 수 없는 나이. 그가 남긴 12살의 아들과 7살의 딸.
부모님과 아내에게 각각 한 통
그리고 그의 자녀 앞으로 13살, 18살, 21살, 결혼할 때, 아이를 가졌을 때 열어보라는 모두 12통의 편지와 a wake 와 장례식 없이 화장해 달라는 짧은 노트를 남기고 그가 떠나버렸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와 함께 하던 친구들은 그의 유지를 거스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를 그냥 떠나보낼 수도 없었다. 셀러브레이션 오브 라이프 하기로 결정했다.
함께 찍은 사진들을 모으고 각자의 성의대로 돈을 내서 행사장소를 섭외하고 그와 함께하는 마지막 파티이기에 오픈 바도 준비했다. 그의 아이들을 위한 칼리지 펀드도 함께 만들었다.
형제들, 친구들, 동료들, 그의 아이들과 아이들의 친구들까지 각각 스피치를 했다.
그와 그의 삶에 대한 찬사와 농담은 끊이지 않았다. 그는 그 모든 찬사를 과장없이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7살짜리 그의 딸이 연단에 서서 여기에 와준 자기 친구들에게 의젓하게 인사를 하고 그는 정말 좋은 아빠였어요. 했을 때 우리 모두는 견딜 수가 없었다.
행사가 끝나고 그의 가족들이 돌아갔을 때, 남은 친구들은 비로소 참지 않고 울 수가 있었다.
그들은 오랜동안 A가 떠나고 난 후에 남겨진 서로를 걱정하고 위로했다. 그들에겐 그것이 필요했다. 남편 친구 부인 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나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는 꼭 많은 돈을 기부하거나 오랜 시간을 들여 자원봉사 하지 않아도 되요.
그저 A가 우리에게 보여운 것처럼만 하면 됩니다. 그는 'one of kind' 가 아니었어요. 그저 우리 모두가 가진 것을 쉼없이 보여주었던 사람이에요"
내 자신의 위로를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는 이곳에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편하게 글을 쓰셨으면 한다. 친구 A는 위로가 필요한 곳에 언제나 다정하게 있던 사람이다. 나도 그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