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정의구현 사제단 창립50주년 성명서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 50주년 성명서] 

 

사제단을 일으켜 세운 순교자들

 

  1. 50년 전 갓 서른을 넘긴 젊은 신부들이 안락한 성소를 박차고 서울로, 명동으로 집결했던 것은 주교 지학순의 수감 때문만도 아니요, 독재자 박정희의 폭압 때문만도 아니었으니 그것은 이곳 지하묘소에 잠들어 계시는 순교자들의 비상호출 때문이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열린 세상을 꿈꾼 죄로 국가폭력에 희생되신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우리 강토 곳곳에 뼈를 묻으신 순교자들의 천둥 같은 부르심이 아니었으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은 출현할 수 없었으며, 반세기에 이르는 줄기찬 실천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제단의 등장 이후 한국천주교회는 마땅히 가야했으나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새롭고 험한 길을 비로소 걷기 시작했습니다. 
 


  2. 그런데 우리가 <제1시국 선언문>에서 천명했던 “유신헌법 철폐와 민주헌정 회복/ 국민 생존권과 기본권 존중/ 서민대중을 위한 경제정책 확립”은 지금/ 짓다만 밥처럼 이도저도 아니게 돼 버렸습니다. 애국청년학생, 노동자와 농민, 양심적 지식인과 종교인들이/ 살벌하고 교활하고 악랄했던 독재 권력에 맞서 피눈물로 이룩한 성취가 시시각각 급속도로 무너져 내리고 있으니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민주의 이름으로 크게 일어설 때가 왔음을 말씀드립니다. 
   


  3. 지난 달 사제단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순례하였습니다. 조선의 첫 신학생들이 목숨을 내놓고 건너던 거기서 “진리의 찬란한 빛 담뿍 안고 한 떨기 무궁화로 피어나신” 선배들의 고결한 삶을 돌아보았으며, 손에 닿을 듯 가까운 북녘의 산하를 눈으로 어루만지면서 생나무 절반이 찢겨나간 이 현실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지나온 오십 년을 돌아보고 나아갈 오십년을 내다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을 살고 있으니 우리는 두려움 없이 내일을 건설할 것입니다. 짐도 무겁고 길도 멀지만 주님께서 맡기시는 사명이므로 우리의 멍에는 가볍고 편합니다.   

 

 

  4. 사나운 폭염 아래 줄곧 시달리다 한여름 못잖은 가을 더위로 지칠 대로 지쳐버린 모든 분에게 위로를 보냅니다. 먼 옛날부터 착한 사람들을 괴롭힌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어찌하여 악인들의 길은 번성하고 성공하여 편히 살기만 하는가?”(예레 12,1) 성경의 대답은 단순하고 단호합니다. “악인들이 풀처럼 돋아나고 꽃피듯 피어나더라도 그것은 영영 멸망하기 위함이다.”(시편 92,8) 당장은 악이 승리하는 듯 보여도 오래 가지 못합니다. 악인들은 풀과 같고 의인들은 나무와 같습니다. 풀과 달리 나무가 자라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므로 불의의 기세에 놀라지도 눌리지도 맙시다.  

 

 

 

  5. 이참에 세상을 치명적으로 병들게 만드는 사회적 현상 하나를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종교가 공정을 외면하고 정의구현이라는 본연의 직무를 팽개치는 태만입니다. 공정은 지상에 구현되어야 하는 하늘의 명령이고, 정의는 그것을 바르고 의롭게 펼치는 사람의 도리입니다. 7,80년대 교회가 그나마 떳떳하고 듬직했던 것은 공정의 집행인 정의를 최소한의 애덕으로 여기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대붕괴의 시대’를 맞이한 오늘, 교회마저 세상의 슬픔과 번뇌를 외면한다면 사람들이 서러운 눈물을 어디서 닦겠습니까? 우리부터 사제단을 결성하던 때의 순수하고 절실했던 초심으로 돌아가겠습니다.   

 

 

 

  6. 투쟁은 쉽고 건설은 어렵습니다. 저항은 쉬우나 참여와 창조는 힘이 듭니다. 밤낮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는 데 일로매진하는 검찰독재의 등장은 민주화 이후 우리가 무엇을 고쳐서 무엇을 창조해나갈 것인지, 그리하여 어떤 나라를 이룩할 것인지 그 목표와 의지가 흐릿해지면서 벌어진 변칙 사태입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갈 길이 어느 쪽인지 정해야 합니다. 너도 나도 하나에서 나온 ‘한생명’이니 살림도 ‘한살림’이어야 합니다. 저만 알아 저만 살려는 각자위심, 각자도생은 그 누구에게도 안전한 미래가 아닙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 사이의 불신과 미움을 포용과 이해로 바꿉시다. 너와 나의 뜨거운 사랑을 상생의 에너지로 바꾸기만 하면 얼마든지 쳐낼 것을 쳐내고, 버릴 것은 태워서 거룩한 선열들이 꿈꾸던 나라를 향해 전진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넘어서 기묘하게 일하시는 
하느님께 찬미와 찬송을 드리며 

2024년 9월 23일 
명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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