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나네요. 저희집은 밤 까는 건 항상 아버지 담당이었어요.
아버지는 정년퇴임 때까지 공무원으로 성실하게 일하시고 혼자 지방 근무도 많이 하셨는데 집에 오시면 바로 런닝셔츠만 입고 엄마가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셨어요. 콩나물이나 콩 까고 마늘 까고 그런 일 하도 많이 하셔서 오죽하면 도우미 이모님도 아저씨 이것좀 해주세요 하고 스스럼없이 시킬 정도였고요. 아침 차리고 커피 끓이고 식구 누구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토마토 쥬스 수박 쥬스 원하는대로 도깨비 방망이로 갈아 주시고요. 설거지도 다 당연히 아빠 담당. 강아지 목욕 산책도 오롯이 아버지 몫. 엄마는 목소리 크고 평생 도우미 부리고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면서 가장인 아버지를 그렇게 부려 먹었는데 키만 삐쭉 크고 기가 약한 아버지는 그걸 시키는 데로 열심히 하셨어요. 계란 하나 제대로 못 삶냐 어째 당신은 맨날 첫날밤이냐 쿠사리를 받으면서요. 오죽하면 그런 광경이 신기한 제 친구들도 맨날 집에 놀러오고 아버지가 끓여주시는 커피 대접을 받았어요.
조카가 6-7살쯤 되었을 때 누가 못된 질문을 했어요. 우리집 서열을 매겨 보라고요. 할머니 엄마 아빠 이모 도우미 이모님 기타등등 강아지, 그 다음 맨 마지막 할아버지. 어린 아이가 볼 때도 제 아버지는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다음 맨 밑. 아니나 다를까 어느 해 추석, 아버지가 하루 종일 밤을 깎으셨는데 한 대접 수북하게 깎아 놓고 잠깐 화장실에 다녀 오시는 동안 강아지가 그걸 날름날름 재빨리 먹어 치웠어요. 한 3분의 2 정도를요. 이 상황에서 누가 야단을 맞았을까요. 놀랍게도 저희 집에선 밤을 훔쳐 드신 강아지는 입맛이 고급이라고 칭찬을 받고 화장실 다녀오신 아버지가 잘못이라고. 비싼 밤을 잘못 간수했다고 나가서 다시 사다가 또 까야 했어요. 아버지는 엄마한테 뭘 그렇게 잘못해서 평생 구박받고 돈 벌어다주고 집안일까지 하셨을까요. 엄마는 기가 세고 성질이 불같고 아버지는 착해서? 엄마는 서울 양반가 출신, 아버지는 시골 계룡남이라서? 아직도 모르겠네요 부부간의 갑을 관계. 이제는 돌아가시고 다 옛날 이야기지만 다음주에 돌아오는 아버지 생신에 끓이려고 기장 미역 사다 놨어요. 보고 싶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