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시아버님이 살아 계실 때

 

마을에서 정기적으로 몇달에 한번씩 관광버스를 타고 일일 여행을 다니시는데

 

그럴 때 시어머니께서 며느리인 나에게 전화를 해서

 

아버님이 점심식사할 때 쯤 핸드폰으로 전화 한번만 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하루종일 한번도 오지 않는 전화기를 들고 다니는 아버님이 안돼 보이신다는

 

것이었다. 식사시간을 가늠해 전화를 드리면 아버님은 오래도 받지 않고

 

잘 도착하셨다며 그래 그래 하고 전화를 끊으셨다. 그 일을 가끔 했다.

 

 

 

신장암으로  한쪽 신장을 제거 한 후 잘 지내셨는데 7년이 지나 투석을 받게 되셨고

 

시골에서 투석받으러 잘 다니셨다. 투석도 무난히 잘 받으시던 중 폐암 4기 선고를

 

받으셨고 한동안 잘 지내셨지만 폐암이 심해지자 투석받으시는게 너무 힘들어

 

투석을 포기하시겠다고 하셨다. 평생을 살아온 시골집. 아버님이 태어난 그 작은 방에

 

작은 몸을 누이고 투석을 하러 가지 않으시겠다고 하자 그 모습이 너무 가여워

 

시어머니가 우셨다. 모든 형제가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내가 모시고 와야겠다고 생각해서

 

모시고 왔다. 거의 삶의 끄트머리에서도 자식들은 아무도 아버지를 모셔가지 않으려고 했다.

 

서로 정말 오랫동안 눈치만 보았다. 집에 오시던 날 시아버님이 우리집 현관문을 들어서시며

 

미안하다 이런 모습으로 와서. 하시며 엉엉 우셨다. 따라 오신 시어머니도 우셨다.

 

두 분은 오직 두 분이서만 너무 힘드셨던 것이다. 나도 울었다. 그렇게 시아버님을 모시고

 

투석을 다니게 되었는데. 투석을 하러 가면 시아버님은 옷에서 핸드폰을 꺼내 손에 꼭 쥐고

 

침대에 누우시는 것이었다. 투석을 하는 동안 그 전화는 한번도 울린 적이 없었다.

 

아버님에게는 전화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었다.

 

나는 한번도 저 전화가 울렸으면 하고 바랐지만 전화기는 울린 적이 없었다.

 

아버님의 세 아들은 다들 바쁘고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낯간지러운 소리를 할 줄 몰랐다.

 

 

아버님이 일주일에 두번 하다가 세번 하게 된 투석실에 들어가서 겉옷을 벗고

 

침대에 누우시며 겉옷에서 핸드폰을 꺼내 손에 꼭 쥐는 모습을 바라 보며

 

누구라도 아버님에게 전화 한통 해 주기를 바랐다. 시어머님이 내게 부탁하시던

 

그 마음이 뭔지를 나도 알게 되었다.

 

세 달이 지나지 않아서 아버님은 몸이 가랑잎처럼 마르고 작아져서 돌아가셨다.

 

 

 

가끔 아버님 생각이 난다.  나는 아버지의 임종도 엄마의 임종도 시아버님의 임종도 모두 

 

보았다. 아버지의 임종은 나 혼자. 엄마의 임종과 시아버님의 임종은 가족들과 같이 보았다.

 

부모님을 모셨으므로 돌아가신다고 마음이 좋은게 아니었다. 누군가가 떠날 때

 

잘해준 것은 하나도 남지 않는다. 수많은 후회와 죄책감이 그 자리에 남아서

 

나는 울고 울고 또 울었다. 오랫동안 그 감정들은 상처로 남았다.

 

 

 

아버님이 떠난 자리에도 상처가 남아서 오랫동안 힘들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아버님이 나를 사랑해주셨기 때문이었다. 무척 사랑해주셨다.

 

그렇지만 나는 아버님께 잘하지 못했다. 마음으로 너무 힘들었고 아버님은 그것을 알았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슬픔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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