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아흔 살 엄마 이야기

오랜만에 친정에 가서 친정엄마와 나란히 누워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정확히는  엄마 얘기를 들어드린 거죠.

90세가 넘으니 엄마 인생엔 많은 옛날이 있고 많은 일들이 떠오르나봐요.

 

엄마는 50년대 중반에 전쟁의 비극도 비껴갈만큼 첩첩산골에 살았대요.

아버지는 같은 마을의 가장 가난한 집 총각이었는데 청혼하러 직접 왔고 엄만 아버지가 싫지 않았대요.

두분다 학교 문턱에도 못가봤고 아마 조선시대와 다를바없이 살았던 것 같아요.

 

어느 집 문칸방으로 밥그릇 2개, 숟가락 2개, 옥수수 한말만 가지고 새 살림을 날때 주인집 사람이 그러더래요. 이런 가난뱅이는 처음 본다고..

가난한 부부가 마주 앉아 밥을 먹고 나란히 앉아 아궁이에 불을 땔 때 아늑하고 행복했대요.

굶는 날이 더 많았지만..

 그리고 남의집 밭일 논일을 억척스럽게 해서 땅을 한평씩 늘려갔대요. 초가집이지만 셋방도 벗어나구요.

쌀농사를 지었지만 한번도 쌀밥을 안먹고 쌀을 팔아서 또 논을 사고 했답니다.

 힘들었지만 그렇게 재밌더래요.

모내기나 김매기 씨뿌리기 등 많은 일손을 사서 일을 하려면 점심이나 새참을 계속 만들어야해서 농삿일을 하면서 하루 걸러 두부를 만들고 된장 고추장을 만들고 산나물을 뜯어오고 장을 보러 장에 가야했대요.

읍내 장은 30리를 걸어가야했는데 신발도 없이 맨발로 다녔더랍니다.

고무신이 있지만 아껴야해서요.

그 옛날 돌멩이가 가득한 길이었을텐데 억척스럽고 부지런하던 젊은 아낙은 옥수수나 콩을 이고 아기를 업고  맨발로 걸어서 장에 가서 간고등어나 밀가루 같은 걸로 바꿔왔대요.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행같은 그 삶을 생각하니까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엄마는 그 시절엔 힘든줄 몰랐대요.

새벽부터 쉬지 않고 일을 해서 초저녁부터 졸음이 몰려왔지만 저녁을 먹고나면 등잔불 아래서 베를 짰대요. 아버지의 일과도 비슷했겠지요.

부모님의 첫 자가였던 세칸 초가집에서 다섯 아이가 태어났어요. 60년대 후반생인 저도 그 집에서 태어났답니다. 

도시에선 눈부신  발전이 이루어지던 시기인데 그 시절 강원도 시골에선 등잔불 아래서 베를 짰다는게 믿어지지가 않더군요.

부모님은 부지런하고 눈썰미있고 강인하며 명석한 분들이셨어요.

두분다 무학이지만 스스로 이치를 깨칠줄 아셨고 논과 밭을 차근차근 늘려갔고 아버지는 틈틈이 독서를 하고 신문을 구독하는 특이한 농부였어요.

전날 석간을 다음날 우체부가 배달해줬죠.

다섯아이 중 막내인 제가 태어난 후 작은 기와집을 사서 이사를 갔고 저는 가난을 모르고 자랐어요. 부자도 아니었지만  결핍을 못느꼈어요.

그리고 부모님은 5명의 자식을 상급학교에 보냈어요. 큰오빠가 중학교에 갈무렵 그 시골 촌에서 유일하게 중학교에 갔대요.

그렇게 다섯명을 다 대학을 보냈어요.

이제 더이상  돈은  모이지 않았고 자식들 도시로 보내고 하숙비와 학비 버느라 더 고단한 농부가 되어 뿌듯함 한켠엔 근심 주머니가 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도시에서 공부한 자식들은 다 도시에서 살고 있어요.

부모님만큼 부지런하지도 명석하지도 않은 자식들은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고 도시에서 고만고만하게 살아가면서 귀향의 꿈을 꿉니다.

월급쟁이로 살았지만 농부를 꿈꾸다니 참 아이러니한 귀소본능이네요.

 

아흔의 엄마는 풍요가 넘쳐나는 지금보다 가난했던 옛날이 더 재미있었대요.

누구나 과거는 다 그런 건가 봐요.

저도 깡시골에서 살던 8살까지가 가장 행복했고 그리운 시절이거든요.

 

엄마 집엔 제법 넓은 마당이 있는데 한켠엔 갖가지 꽃을 키우시고 또 한켠엔 각종 채소를 키우세요.

그렇게 꽃과 채소를 키우면서 옛날을 그리워하면서 엄마는 살아가세요.

남은 엄마의 여생은 더 행복하셨음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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