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계획했던 결혼까지의 본편의 이야기는 어제의 6 편 까지 였고
7 편은 에필로그 같은 결혼 후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들입니다 .
결혼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은
신혼여행이 아니고
시장에 가서 제기를 구입하는 거 였습니다 .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셔도 기일에 밥 한 번 차려드리지 못했다고 하여
제가 제사 지내자고 같이 서문시장에 가서 제기를 구입했습니다 .
1 월 2 일에 있던 아버님 제사 지내고 나니까
여태껏 너무 죄송했는데 고맙다고 정말로 고맙다고 그랬습니다 .
그리고 너무 이것저것 할려고 하지 말고
다음부터는 간단하게 차리자고 그러더군요
제사지내고 나서야 제주도로 1 주일 신혼여행을 다녀왔습니다 .
배에 우리 차 싣고 들어가서 다녔는데
저 태어나고 이렇게 황홀하고 아름다운 여행을 한 적이 있었는가 싶게
그 사람하고 하는 일상은 한순간 한순간이 다 그림 같았습니다 .
그리고 그 이후에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해서
다 집으로 모셨습니다 .
국악회 회원 , 남편 대학 동기들 모임 , 고향 학교 친구들 모임 등
집들이라기보다는 그동안 혼자 있는 남편 걱정해주고
뭐 하나라도 챙겨주신 마음에 대한 감사함을 대신하기 위한
그런 마음이니까 몇 번을 음식을 준비하고 치우고 해도 힘들지 않았었어요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궁금해 했어요
겉으로 보기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 어떻게 결혼까지 갔느냐고
그러면 박 선생님은 항상 똑같이 이야기했습니다 .
둘 다 마음이 통해서 좋아했지만
자기가 훨씬 더 많이 좋아해서 결혼하자고 밀어부쳤던 거라고
저는 이미 알았어요
쑥맥같은 박선생님이었지만
결혼을 비밀리에 진행했던 것도
이러쿵 저러쿵 사람들 말 많을 걸 미리 알았고
또 자기가 더 좋아해서 밀어부쳤다면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을 거라는 걸요
티 나지 않게 조용조용 저를 배려해주는 사람이었더라구요
그렇게 매사에 표시나지 않게 저를 배려해주는 사람이니까
결혼하고 나서는 마음으로 더 믿고 더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 해 추석에 부모님 납골당 추모관에 갔는데
두 분이 너무 멀리 떨어져 계셔서 마음이 안 좋다 하길래
마침 다음 달이 윤달이어서 좋은 날 잡아
낙동강이 물줄기가 저 멀리 발 아래로 펼쳐지는 양지바른 좋은 곳에
두 분을 같이 모셨어요
이 일은 박 선생님이 두고 두고 저한테 고마워했구요
그리고 이듬해 아이 군대 가기 전에
해결한 문제가 하나 있었어요
가족관계증명서에 가족이 셋 다 성이 달랐던 문제
남편도 아들도 서로 흔쾌히 동의하에
아들의 성본 변경신청을 하여 가족관계상 아들로 ...
20 세 성인이라 입양이 안되는 나이라서
호적은 어쩔 수 없었지만
아버지와 아들로 서류상 관계를 정립했습니다 .
누군가는 결혼할 때 입양하라고 했지만
제가 강요할 부분이 아니고 아들이 충분히 생각해보고 결정하게 했는데
성인이 되는 시점과 겹쳐지는 바람에 .....
아이와의 관계는 별문제 없었어요
군대 다녀오고 학교 다닐 때 어린이날 밥 사준다고 같이 갔더니
아부지 함 안아봐도 됩니까 ??
이러면서 덥석 안고
아부지 고맙습니다 그러더라구요
꼭 표시나게 뭘 안해도 그냥 말없이 마음으로 메시지들을 전하고 받는 가봐요
아이한테 들어가는 학비나 컴퓨터 작업용 테블릿 등
큰 돈 들어가는 일은 다 자기가 해결해 줄려고 했고
그렇다고 해서 저는 또 전부 다 박 선생님이 부담하게 하지는 않았어요
저도 아들 하나 공부시킬 정도의 준비는 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랬는지
어느 날 통장을 보니 10 일 동안 인터넷 뱅킹으로 1 일 한도만큼
꼬박꼬박 입금을 해서 제 평생 만져보지 못한 거금을 입금한 거였어요
저 같으면 단돈 10 만원도 그렇게 하기 어려울 텐데
본인한테는 천 원짜리 한 장도 아끼면서
저한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었더라구요
앞으로 아들한테도 큰돈 들어갈 일 있을 거니까 비상금처럼 넣어 두라고
아니면 그동안 못 해 보았던 것이나 하고 싶었던 거 있으면 해도 된다고 ....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들까지 생각해서 미리 챙겨주는
그 마음이 참 고마워서 그 돈은 몇 년을 쳐다보기만 했다지요 .
나한테도 이제 기댈 언덕이 있고 그 사람이 바로 내 편이었다 라구요
3 년 정도 부모님 제사 열심히 지냈더니
이제는 집에서 그만 지내고 산소에 가서
아주 간단하게 최소한의 준비만 해서 가자고 했습니다 .
밥 , 국 , 탕 , 술 , 나물 세 가지
그렇게 해서 그저께 장보고 음식 간단히 준비해서 산소를 다녀온 거였습니다 .
어머님 기일이었거든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산소에 다녀올 때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잘 납니다
이날도 다녀오면서 가슴 한 켠이 아리고 또 코끝이 찡 ..
나중에 나이 들어서 호호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면 그때는 헤어져야 되는데
어떻게 저 사람이랑 헤어지고 어떻게 보내 주어야 하나 그런 마음이 들어서요
또 그러면서 마음을 다잡기도 합니다 .
나중에 후회하는 마음 조금이라도 작게 들도록
지금 더 열심히 사랑해주고 사랑받고 그렇게 살자 하구요
마지막으로 아들에 관한 이야기 하나만 더 할게요
예전에 인터넷상의 만남이 오프라인에서도 이어진 모임이 있었고
저를 늘 잘 챙겨주고 걱정해주셨던 분인데 여기 회원이기도 하셔요
프로포즈 받았다는 저의 글에
근처 중학교에 비슷한 경우 아들이 그전에 가족이 살던 아파트에 가서
뛰어내렸다는 댓글을 달았던 적이 있었어요
저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그 사람 글에 댓글도 안 달고 그랬다가
3 주 정도 후에 그 이야기가 나왔고
제가 이야기했더니 기억이 없다고 설사 그랬다고 해도
함께 알고 지낸 지가 얼마인데 별일 아닌걸로 문제 삼느냐고 다시 댓글 달고
그 이후에 딱 한 번 전화왔었는데 받고 싶은 마음이 아니어서 안 받았어요
그랬더니 오히려 운영자 뒤에 숨고 저를 강퇴시켜 버렸거든요
운영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분이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요
사과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는데 .....
참 오랜 시간 동안 나의 재혼으로 혹시나 아들이 잘못될까 봐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전전긍긍 저 혼자 가슴앓이를 하며 살았지만
제 글을 보고 계실테니 이번 글을 계기로 말씀드리고 싶어요
저 기억력 아직도 짱짱한데
무려 11 년 전에 제가 잘 못 보고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 그 집 아들걱정된다요 했던 그 글자들 한자한자 다 기억하거든요 )
정말로 제 아이가 걱정되어서 그런 댓글 달아놓으셨다면
이제는 걱정 안 하셔도 된다고 말씀드립니다
웹툰 작가하면서 경기도 어디 쯤에서 무난히 잘 살고 있구요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지금이 참 편안하다고 합니다 .
저도 그 남자랑 살아보니
현 정치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성향도
먹는 것 , 입는 것 , 취미 , 가치관 등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쌍둥이처럼
서로 닮아 있어 10 여 년 같이 산 시간이 30 년도 더 된 것 같은 익숙함으로
다가와 그 남자를 만나기 전의 치열했던 제 삶과는 달리 그냥 하루하루가
편안하게만 느껴집니다 .
그 남자가 처음에는 용기가 없어 먼저 잡지 못한 손이었지만
이제는 시장 갈 때도 여행 갈 때도
심지어는 쇼파에 앉아서 티비 볼때나 , 잠자리에서도
두 손은 놓지 않고 꼭 잡고 다닌답니다 .
아들 녀석이 여행지에서 뒤따라오면서 그 모습이 보기 좋다고 사진 찍어서
보내 줄 정도로 이제는 어렵게 잡은 그 손 놓지 않을 사이좋은 부부가 되었네요
오늘 같은 장날이면 시장에 갔다 오는 길에 600 원 하는 누가바
한 개만 사가지고 여전히 한 손은 잡은 채 남은 한 손으로
여보 한 입 나 한 입 나눠 먹고 밖에 쵸코 나보다 더 많이 먹지 말라고 그러면서
꽁냥꽁냥 다니고 있을 거에요
남들보다 늦게 시작된 인생 2 막의 그 여자와 그 남자에게 있어 나이란
숫자에 불과할 뿐 마음만은 아직도 연애 중인 풋풋한 20 대랍니다
처음 계획은 간단하게 결혼이야기까지 3 편 정도였는데
성원해주셔서 7 편까지 쥐어짜 내느라 쪼메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서투른 제 글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
저는 저 쪽 방에서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뵙겠습니다 . 꾸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