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그 남자 이야기 6

여름 방학을 코앞에 두고 결혼하기로 했으니

나름 기대가 많았었습니다

시간이 여유로우니 여행도 많이 다니고

꽁냥꽁냥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줄 알았지요

그랬는데 박 선생님은 방학과 동시에

업무관련 타 지역 2 주간 심화연수를 해야 된다고 했어요

 

방학을 해도 전혀 달라질 것 없는 상황

주말에나 되어야 또 만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어쩌겠어요

그렇게라도 얼굴 보면 좋고 같이 하는 모든 일상이 좋은데 ..

시간만 나면 쪼르르 달려가서 만났어요

 

연수도 끝나고 이제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을 때

결혼 준비에 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살림은 박 선생님이 살던 구미의 30 평대 아파트

결혼은 12 월 24 일 ( 겨울방학에 맞춰서 )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결혼 반지 맞추기

3 년 전에 고장이 나서 가동을 멈춘 아파트 보일러 교체

17 년 된 아파트 리모델링

가구 장만

가전제품 장만

그리고 부모님께 인사드리기

 

그런데 그 전에 방학이 끝나기 전에

제가 또 한 번 도발을 해버렸습니다 .

3 개월 가까이 근처 관광지는 다 둘러보았기 때문에

좀 더 멀리 여행을 가보고 싶기도 했고 

매 번 당일치기라서 너무 피곤하기도 했거든요

그리고 결혼도 하기로 했는데 맨날 땀나도록 손만 잡는 것은 영 ~~

그래서 이번에도 또 제가

“ 박샘 우리 이번에는 좀 멀리 여행 가는 거 어때요

담양 소쇄원 정원을 한 번 가보고 싶어요 ”

그랬더니 못이기는 척 계획을 한번 짜보겠다고 하더라구요

 

아들한테는 저의 결혼 약속도 아직은 비밀이었어요

입시 마무리될 때까지는 어떤 혼란도 주지 않을려고 비밀리에 ...

아들이 방학 끝나기 전 8 월 중순 친구들과 야영한다고 했던 날에 맞추고

담양 소쇄원과 백양사 이렇게 코스를 짜서 알려 주더라구요

당일치기는 어려우니 숙소도 예약했다고 하고요

저야 뭐 늘 하던 대로 가면서 먹을 도시락이나 먹거리들 챙기고

며칠 전에 혼자 대구 동성로에 가서 별로 야시시하지는 않고

좀 소녀스러운 슬립 하나 챙겨두었구요

( 슬립인데도 저한테 특별대우 받느라 지금도 옷장 속에

귀하게 팔랑팔랑 걸려 있는 ㅎㅎ )

 

그렇게 여행을 다녀오고

보일러 수리를 위해 그 남자의 집을 처음으로 방문을 했습니다 .

가구라고는 아파트 기본옵션 붙박이장과 책상 거실장이 전부였고

티비 , 냉장고 , 전자레인지 , 3 인용 전기밥솥 , 선풍기 각 한 대씩

처음 분양받고 올 때 어머님이 해주셨다는 목화솜 이불 한 채와 둥그런 밥상

고장난 보일러 대신 물 데우는 용도의 1 말짜리 스텐 들통 두 개가 전부인

홀 애비 냄새 폴폴 나는 노총각 살림살이들

3 년 전에 보일러가 고장났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물 데워서 씻고 전기장판에서 자고 그렇게 살고 있는 겁니다 .

요새도 이렇게 사는 사람이 있나 고개를 갸우뚱하게 될 정도였거든요

 

방 세 개 중 안방은 한 번도 사용을 안하여

화장실 변기 안에는 17 년 전 97 년 입주할 당시의 계림요업 종이 딱지가 그대로

붙어있고 중간에 붙박이장과 책상이 있는 그 방 하나만 사용한다고 하더군요

 

가장 먼저 한 일은 아파트 청소

내 키보다 더 높은 햇반용기 탑이랑 재활용 쓰레기 전부 치우고

보일러 대리점 가서 계약하고 날 잡아 보일러 교체했고

그리고 리모델링 업체 알아보기 였어요

그 남자는

인터넷 보니까 평당 100 만원 정도로 예상하면 된다고 하더라면서

전체 리모델링 4000 정도 있으면 되냐고 하더라구요

리모델링을 인터넷으로 공부해서 할려고 ....

 

제가 학교에 있기도 했지만

업무관련 리모델링을 5 번이나 한 경력이 있거든요

어떤 때는 업체의 설계가 마음에 안 들면 제가 설계를 하고

붙박이 가구들도 제가 디자인이나 사이즈 관련 도면도 직접 그리고

또 학교니까 시트지 많은 가구보다 거의 원목을 많이 사용했구요

그래서 그런 경험들이 있으니 별 어려움도 없었고

씩씩하게 같이 업체를 몇 군데 다니면서 견적을 받았어요

 

전체를 맡기는 것이 아니고

공용화장실은 욕조 없애고 전체 리모델링

전기공사 , 도색 , 도배 , 붙박이장 설치 ,

앞 베란다 타일 새로 교체 , 필요한 곳은 장판깔고

창마다 롤 블라인더 설치 까지

싱크대는 깨끗해서 교체하지 않았고

물 한 번 내리지 않았다는 안방 화장실도 그대로 두었고요

이렇게 조목조목 견적을 받으니 전체 다해도 1000 만원이 안 넘었어요

그랬더니 정말 생활경험치가 없어서 세상 물정을 모르던 박선생님

눈이 똥그래졌었지요

 

결혼반지는

대구 동성로 귀금속 거리 젊은 커플들이 많이 가는 곳에 가서

각자 이름 이니셜 새겨넣은 커플링으로 맞췄어요

백금에 세로로 큐빅 세 알 한 줄로 박힌 것

반지 맞추러 가면서 또 찾아오면서

기차타고 대구가서 동성로 뚜벅이 데이트도 하고 영화도 한 편 보구요

 

공사 시작하고 가구와 가전을 장만할 때

그 남자랑 작은 실랑이가 있기도 했어요

저는 20 대에 직장생활 하면서부터 월급의 50% 이상 저축은 루틴으로

꼭 지켜오던 습관이 있어서 통장에 자금이 좀 있었거든요

그런데도 저런 모든 과정들 비용을 본인이 다 부담한다는 겁니다 .

저는 또 저대로 그렇게 그 남자한테 결혼과 관련된 비용들을 다 부담시키고 싶지 않았구요

살림살이도 너무 옹색하고 집에서 입는 10 년이 넘은 손목이 다 헤져서

너덜거리는 츄리닝 두 벌을 보고 나니까 허투루 돈 쓰지 않게 아껴주고

싶었는데 결혼 관련 비용은 전부 자기가 부담한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럼 침대 하나라도 내가 해가게 해 달라고 해서

나중에 저는 침대만 달랑 하나 싣고 그 아파트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

 

늦가을에 수시 발표가 나고

아이는 가고 싶어하던 학교에 가게 되었어요

그리고 나서 같이 만나서 인사하고 결혼한다고 이야기 했구요

아이는 늘 그래 왔거든요

저 군대 가고 나면 엄마 혼자 외로워서 어쩌냐고 ..

그래서 그런지 그냥 잘 되었다고 축하해 줬구요

뭐 남자들 둘은 처음 만나서 그런지

그냥 표현들이 별로 없이 맹숭맹숭 하기는 했지만 분위기는 괜찮았어요

 

결혼식은

따로 하지 않았어요

처음 결혼 계획할 때부터 결혼식은 없었거든요

그냥 별 탈 없이 잘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고

혼인신고만 하자고 하는 그 고집을 제가 못 당하겠더라구요

그냥 제 추측으로는 부모님 살아계실 때 가정을 이루지 못한 불효함과

또 저에게는

두 번의 예식을 치루게 하고 싶지 않아서 배려해 준 것 같기도 하고요

 

10 월 3 일 개천절에 청도집 가서 부모님께 인사드렸고

12 월 23 일에 엄마 생신이라 청도에서 가족들이 다 모였을 때

형제들하고도 다 인사하고 결혼하다고 통보했습니다 .

제가 근무하는 학교는 방학이 며칠이 남아서 연가를 냈고

박 선생님네 학교는 종업식이라 학교 일정 마치고

그렇게 2013 년 12 월 24 일 오후 2 시에 박선생님 주소지 구미시청으로

혼인신고서 들고 아주 경건한 마음으로 갔습니다 .

 

저는 학교의 친한 동료 2 사람 한테만 바로 직전에 알렸고

박 선생님네 학교는 아무도 몰랐어요

무슨 첩보작전도 아니고 ... 뒤에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나는 게 싫었대요

심지어는 구미 가는 도중에 국악회장인 오랜 친구가 전화를 했었어요

이상한 소리를 들었는데 맞느냐고 확인하는 전화였는데

제가 옆에 앉았는데도 아니라고 낭설이라고 일축해 버리더라구요

하여튼 엄청 부끄러움 많이 타고 시끄러운 거 싫어하는 그런 남자였어요

 

몇 년 동안 공들여서 하는 결혼이라서 너무 경건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진지하게 혼인신고서 제출하러 갔는데 서류만 받고 그냥 다 되었다고 하니

그때 황당해하던 그 남자의 얼굴이 지금도 선합니다 .

 

이렇게 순진무구하고 부끄럼 많은 목석같은 그 남자와

순박한 척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저돌적이었던 그 여자의 결혼은 성립되었고

해마다 2 월 26 일 첫 데이트 날은 226 투어로 , 12 월 24 일 결혼기념일은 224 투어로 명명하여

그 장소로 다시 찾아가서 추억해보게 되는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인생에서

아주 소중하고 뜻이 깊은 중요한 날이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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