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혼자 있어서 써 보는 우리 할머니 이야기 (8)

글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오늘 쉬는 날인데 애는 공부인지 사교인지 모를 행동을 하러 

암튼 집에서 나갔어요. 아휴...... 제가 엄마랑 할머니 이야기를 쓰면서 느끼는건데 우리 애는 

나중에 엄마가 공부하라 소리만 했을거라고 기억할 것 같아요.... 

저도 공부해라 소리 많이 듣고 컸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던거 같구요. 그때는 저희 집으로 

진짜 거짓말 안보태고 팔촌까지 모여들던때라 집에 늘 손님이 있었기에 공부 할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취직 면접을 보러 올라와도 우리 집으로 오고 잔치가 있어도 우리 집으로 오고 그랬어요. 

저희 할머니 이야기 좋아해주셔서 할머니 이야기 오늘 짧게 쓸게요. 

 

할머니는 일제시대때 소학교를 다니셨는데 머리가 정말 좋으셨다고 해요. 저희 집이 독립군 집안 까지는 아니지만 독립군 지나갈 때 은근슬쩍 순사 발 걸어주는 정도는 했던 집이었나봐요.

할머니의 할아버지가 할머니한테 어디어디에 가서 이거 봉투 주고 감주 얻어먹고 와라 그러면 할머니는 친구네 집에도 들렀다가 산등성이에서 놀다가 남자애들하고도 싸웠다가 하면서 길을 둘러둘러 그 집에 가서 목마르다고 감주 하나 얻어먹고 봉투 주고 왔대요. 지금 생각하면 자금줄 까지는 아니더라도 체면치례는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할머니 말씀을 들어보면 맞고 틀리고가 아니라 살려면 양쪽 편 다 들어야 하는 그런 세상이었던거 같아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할머니는 나중에 치매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어요. 마지막에 노래 아시는거 있냐고 노래 틀어드릴까요 그러면 소학교때 배운 우리는 뜻도 모르는 일본 동요를 부르셨어요. 그런거 보면 일본놈들이 참 잔악한 짓을 했어요. 

 

할머니는 그래도 좀 먹고 살만한 집에서 태어났는데 할아버지는 먹고살만하지만 장남한테 몰빵해주는 집이었나봐요. 할머니가 시집올 때 들고 온 돈이 좀 있었는데 할머니의 형님이 그렇게 못마땅해했대요. (저한테는 큰할머니시죠.) 그래서 왕따 아닌 왕따를 당했다고 하시더라구요. 얼굴도 미인은 아니었고 할아버지보다 연상이셨어요. 저희 할아버지는 남자는 어린 여자 만나야 한다고 어린 제게도 하실만큼 할머니가 연상이신게 싫으셨었나봐요.

 

할머니가 시집올 때 들고 온 돈이 있다는 이유로 본가에서는 할아버지한테 땡전한푼 안주고 내보내셨대요. 원래 막내아들한테는 줄 게 많지 않다네요.

할머니는 그 돈으로 다 쓰러져가는 집의 방 한칸을 얻고 돌밭인 밭을 여러개 사셨다고 해요. 그리고 그 돌을 다 골라내고 친정에서 거름 얻어다가, 풀 베다가 썩혀서 붓고. 그걸 좀 나은 밭으로 만들어 파셨다고 해요. 

그렇게 좋은 밭을 판 돈으로 또 돌밭을 사고.... 같은 걸 또 해서 좋은 땅으로 만들고... 그러다 좋은 논을 사셨다네요. 밭은 돌밭을 기름진 밭으로 만들 수 있지만 논은 물이 귀했기 때문에 좋은 논을 사는게 남는거라고 하셨대요. 

좋은 논을 사서 수확이 좋으면 송아지를 사셨대요. 송아지를 사서 키워 할아버지가 우시장에다가 내다 팔고 또 할아버지가 우시장에 다니면서 소 필요한 사람들 중개도 해주면서 중개비를 받고 하며 둘이 안팎으로 열심히 벌었다고 해요.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없었고 둘 다 부지런했기에 새벽마다 나가서 일을 하고 비가 내리는 날에는 돌 골라내기가 더 쉬워서 계속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의 본가는 먹고 살만한 집이었기에 큰할머니는 집에서 맏며느리의 역할과 지휘를 잘 수행하시는 분이셨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 할머니가 미웠는지 모르지만 말도 잘 섞지 않았고 다른 동서들이나 자기 며느리랑 친하게 지내는 것도 싫어하셨대요.  우시장에서 돈을 벌고 밭을 개간해서 벌고 논농사도 하고 소도 키우고..... 정말 허리 펼 틈 없이 살았대요. 큰 집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하면 또 가서 음식 만들고 그러다보니 애들 신경을 못썼다고 하네요. 

 

시증조할아버지의 제삿날 만들다 망가진 두부전을 소쿠리에 담아서 애들 주려고 했는데 큰아들이 때가 꼬질꼬질한 얼굴로 들어오더래요. 그리고 그걸 큰형님이 하도 못마땅하게 쳐다봐서 가서 좀 씻고 오라고 내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게 큰 아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해요. 개울가에 혼자 씻으러 간 다섯살 아들은 물에 빠져 죽어서 발견이 됐고 아직 호적에도 올리지 않았던 세살 작은 아들이 큰아들의 이름으로 살게 되었어요. 할머니는 저한테 한번도 이야기 한 적이 없고 고모가 이야기 해 주더라구요. 아빠가 이름이 왜 두개인지.... 저는 너무 오래 전 이야기라 모르지만 이야기를 듣는것만으로도... 엄마의 마음으로 가슴이 아프더라구요. 

 

밭이고 논이고 소고 다 정이 떨어진 할머니는 밭과 논을 팔아서 서울에 주택부지를 샀고 마침 서울로 몰려드는 사람들과 집장사들이 많았던 터라 그 주택부지는 할머니가 산 값보다 훨씬 비싼 값에 팔렸고 할머니는 그 돈으로 좀 더 외곽에 있는 주택부지를 사고 또 집을 지어 팔고 하면서 순식간에 

부를 늘려가기 시작했대요.  어떤 날은 오전에 집을 사서 오후에 판 적도 있대요.

그 돈으로 시골에 그럴듯한 집도 사고 서울 오가며 알짜배기 부자라고 소문도 나고

할아버지가 읍내에서 술도 잘 사시고 나중에는 우체국도 사들였대요. 

우체국을 소유한 기간은 짧았지만 그 상징성이 꽤나 컸나봐요. 

 

명절때 가도 말 붙이는 사람 없이 지내던 할머니는 며느리가 들어오니 너무 신이 났대요.

심지어 그 며느리가 예뻐! 말도 잘 들었대요.

모양 빠지는 시어머니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늘 이야기를 귀담아 듣더래요. 

할머니가 서울에 집을 마련하고 동네에서 큰소리를 치며 살게 되자 큰할머니도, 다른 동서들도 

할머니한테 말을 걸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집안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사람이 되었대요. 

그렇게 서울에 자리를 잡은 우리 집은 그때부터 집안의 중심이 되어 서울에 오는 친인척들이 

머물다 가는 여관 같이 되어버렸지만 엄마도 할머니도 신났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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