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짧게 써보는 우리 이모 이야기

안녕하세요 우리 엄마 이야기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동생한테 링크 보내줬더니 토지 쓰냐고 하네요. ㅎㅎㅎㅎ 

저는 외갓집은 잘 몰라요. 거의 가질 못했어요. 할머니가 엄마를 안보낸것도 있지만 

제가 태어난 이후로 할아버지가 저 예뻐하셔서 명절에 계속 할아버지댁에 있었어요.

제가 거기 있겠다고 하니 더 못간거 같아요.

나중에 제가 좀 크고 나서는 엄마만 살짝 외삼촌댁에 다녀오시기도 했었어요. 

가을에는 풀에 쓸리면 안된다고 할머니가 못가게 했고 쐐기? 쐬기? 붙는다고....

겨울에는 눈이 많이 와서 춥다고

못가게 했고 이야기를 쓰며 생각해보니 저도 외삼촌댁을 꼭 가야하나 생각했던거 같아요.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도 굳이 저한테 잘 못사는 외가를 보여주기 싫으셨던거 같아요.

그래도 이모들은 종종 서울에 오면 우리 집에서 자고 갔고 누가 아파서, 결혼식이 있어서 

서울에 오면 꼭 저희 집에 들러서 저 공주같이 대해주다 가셨어요. 

 

참 저는 글 쓰는 일, 말 하는 일 하나도 관련없고 전업주부입니다.

오늘부터 애가 중간고사인데 이미 나락으로 간 것 같아요. 

좀 있으면 올텐데 제가 차라리 여기 정신팔고 댓글 읽는게 애나 저나 서로 좋을 것 같아요. 

그래도 날이 날이니만큼 오늘은 좀 짧은 이모 이야기 하나 쓸게요. 

 

큰 딸은 살림 밑천이다 이 말을 몸소 실천한 사람이 우리 큰이모래요.

저는 큰이모 몇 번 보지 못했지만 문신을 한 눈썹, 얼굴이 하얀 화장. 그리고 특이한 향내.

그리고 걸걸한 말투로 지금도 이모를 찾으라면 찾아낼 수 있어요. 몽타주 그리듯 그릴 수 있어요.

큰이모는 보리쌀 한섬받고 시집을 갔대요. 말이 좋아 시집을 간거지 팔려가듯이 간거지요. 

큰이모의 시어머니는 (편의상 그냥 앞으로 시어머니라고 쓸게요.) 

유명한 무당이었대요. 일제시대부터 굿을 하는 무당이었는데 얼마나 유명하냐 하면 

굿하러 갈 때는 백마를 타고 창을 들고 가는 무당이었대요. 나라에서 큰 굿을 할 때도 

지역대표처럼 나가는 그런 무당이었다고 해요. 작두 타는건 일도 아니었고 동네 큰 일, 작은 일 

고민이 생기면 다 시어머니한테 왔었다고 하네요. 애가 안생기면 애가 생기게 치성을 들어주고

아프면 아픈 사람 낫게 해 주고, 끌려간 아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아맞추는 용한 무당이었대요. 

 

무당이 용하면 굿을 자주 하겠지요. 큰어머니는 그 굿판에 매일 끌려다녔대요. 

굿판에 끌려가는게 무슨 큰 일이겠냐 하겠지만 굿판이 벌어진다는건 우리가 명절 치르듯이 

계속 음식을 하고 준비를 하는거래요. 지금도 명절만 되면 힘들다고 야단인데 그때는 더 했겠지요. 

하얀 두부가 꼭 제사상에 올라가야 했고 두부가 또 잘 쉬기도 해서 여름이 되면 새벽부터 일어나 

불린 콩 끓이고 두부 만드는거부터 시작을 했다고 해요. 전 부치는건 동네 아낙들이 삯받고 

도와주기도 했지만 대부분 음식은 큰이모가 했다고 해요. 우리 아들 나이의 애기가 시집가서 

새벽마다 명절음식 차리듯이 살았고 나이가 좀 들어서는 찬모 아줌마들 진두지휘하고

무당 시어머니 옆에서 북치며 추임새 넣어주고 하다보니 맨날 목이 쉬어서 목소리가 걸걸했대요. 

 

큰이모 남편은 무당 어머니 아래에서 북도 치고 징도 치고 그런 일을 했는데 북치고 징치는 사람이 모자라면 큰이모도 나서서 같이 징 치고 꽹가리 치고 그랬다네요. 큰이모부는 간질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예전에 모를 때는 엄마 때문에 신내려서 저렇다는 말도 듣고 그랬었대요. 큰이모는 밥하고 치성드리고 하는건 다 괜찮은데 자기 자식한테 무당피가 내려갈까봐 그게 제일 무서웠대요. 새벽마다 일어나서 기도하는 시어머니의 삶도 싫었고 굿이 늘 잘 되는게 아니라서 잘 될 때는 사람들이 떠받들어주다가 뭐 하나 수틀리면 문전박대 당하고 낫들고 쫓아오는 사람들도 있어서 잘 때마다 머리맡에 늘 칼을 두고 잤대요. 

 

이런 큰이모가 저희 집에 한번씩 온건 제 기억에 50넘어서인거 같아요. 실제로 그 나이였던건지 아니면 그렇게 나이가 들어보인건지는 모르겠어요. 나중에 결혼하고 들었는데 큰이모는 저런 삶이 너무 싫고 자식한테 무당피 내려가는게 싫어서 부부관계를 맺고 나면 아랫도리가 물러지도록 씻었대요. 부부관계를 거의 안하기도 했지만 애 들어설까봐 별걸로 다 아래를 씻어내서 바닥에 오래 앉아있지 못하고 늘 쓰라려하며 힘들어했대요. 돌계집 소리를 들으며 살던 큰이모는 결국 아이 없이 살다가 간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굿 하고 남은 음식들과 술로 힘든 몸을 추스리며 굿 뒷정리를 하고 집에 돌아오면 힘들고 몸이 아파서 술을 마시고 술 기운에 잠들고 술 기운에 일하고.... 

자식이 없던 집이고 남편이 변변치 못해서 그런지 언제 어디가 아프다 이런 소리도 못 듣고 어느 날 죽었다고 연락이 왔고 화장장에서 만난게 마지막이라고 해요. 

 

엄마가 꿈에서라도 한번 봤으면 좋겠다고 외할머니도 보고 싶지만 엄마 업어서 키워주던 큰이모가 

꿈에서라도 한번 나타났으면 좋겠는데 꿈에서도 안보인다고 하시더라구요. 

근데 저는 지금도 기억이 나요. 다 늘어진 하얀색 메리야스를 입고 색이 빠져 파란색이 된 눈썹 문신에 24K 목걸이가 전재산이라며 항상 목에 걸고 저한테 요년, 여시같은 년. 하면서 제사상에 올라가는 하얀색 알록달록 사탕 주던 이모가요. 이모가 주는거라서 입에 넣었지만 저는 그 사탕 싫어했는데.... 어릴 땐 꼬박꼬박 제삿상에 올라가던 그 사탕이 이제는 어디서 파는지도 모르겠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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