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해주셔서 틈나는대로 기억 떠올려 써 봅니다.
제가 정확한 시기를 기억 못하고 소설처럼 앞 뒤 이야기를 짜맞춰 놓고 쓰는게 아니라
시간 순서가 좀 뒤죽박죽이 될 수 있지만 글 안에서 엄마와 연관된 추억거리 하나 같이
찾으시고 잠깐 엄마 생각하는 시간 되셨으면 해요.
엄마는 본인이 엄청 호강을 하고 살고 있음에 감사했다고 해요.
비록 시누이 시동생 사촌시동생들 아침밥이며 도시락이며 싸고 빨래를 몇번씩 해두요.
가만히 있어도 방바닥이 따뜻해지고 손잡이 돌리면 물 나오고 수세식 화장실 자체가
우리 엄마한테는 성공의 증표 같은거였대요.
또 1층에 작은 마당에 피는 봉숭아꽃과 쓰레기통 위에 핀 라일락들.
그리고 자기한테 잘 해주는 1층 세입자들의 친절.
그 당시 집주인의 위세는 대단했다고 하더라구요.
친구들이 가끔 만나고 싶었지만
친구중에 일찍 서울로 온 친구들은 연락처만 간신히 알고 명절에 고향 내려왔을때나 만날 수 있고
영등포에서 일한다고 하던데 동쪽사는 엄마한테 영등포는 너무 먼 곳이라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고 해요.
그러다 1층에 사는 미숙씨와 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숙씨는 친구와 둘이 자취하는 20대 여자였는데 엄마랑 나이또래도 비슷했고 악세사리 도소매 사무실에 나가는데 미숙씨가 엄마한테 9자말이 부업을 소개해줬다고 합니다.
아빠가 월급을 주었지만 돈 관리는 대부분 아직 할머니가 하고 있었고 또 장보는 것도 할머니와
같이 가거나 아니면 엄마가 따라가는 식이었는데 사람들이 시장에서 지갑을 열면
그 안에 돈을 수북하게 가지고 다니는 것도 신기했고 시장통에 가면 상인들이 빠께스에
돈을 막 던지듯이 넣는데 불안해서 어떻게 저렇게 두고 다니나 했대요.
암튼 이제 엄마는 돈이 벌고 싶었답니다. 혼자서만 호강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다른 식구들의 흰쌀밥을 뜨면서 보리밥에 산나물 뜯어온거 먹고 있을 친정 식구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고 할머니랑 시장갔다가 사 입은 홈드레스를 입고 있으면
구멍난 고쟁이를 입고 그 위에 구멍난 군복 바지를 입는 외할머니가 생각이 났고
눈을 감으면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다니시던 오래 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이런 저런 마음이 들어 집에 있는 시간에 개다리소반에 귀걸이 재료들을 쏟아놓고
작은 펜치로 살짝살짝 말아주는 9자말이를 했다고 합니다. 20개 만들면 5전인가? 그랬대요.
불량이 나면 안되고 너무 구부러져서 찌그러져도 안되고 미숙씨가 가져다주는 재료들을
방구석에 몰래 쌓아두고 할머니가 시골 가시거나 집에서 시간이 있을때마다
열심히 9자말이를 했대요. (이 9자말이 덕분에 할머니가 돈을 줍니다. 그 이야긴 좀 더 이따 쓸게요.)
이 9자말이가 무서운게 조금만 더 하면 끝이 날 것 같다고 해요. 몇 개만 더 만들어야지.
조금만 더 하면 저 봉지가 끝나겠다 이런 마음이 들어서 계속 9자말이를 했는데
그러다 밥 때를 놓쳤대요. 마침 직장에서 퇴근한 아버지는 밥도 안되어있고
방구석에서 열심히 9자말이를 하고 있는 뽀글머리 엄마를 본거죠.
화가난 아버지가 상을 발로 툭 차셨대요. 엄마가 하지마 이거 하고 밥 할게 라고 말했는데
아버지가 어이 아줌마 쓸데없는 짓 하지말고 빨리 밥이나 해요. 이랬는데
갑자기 너무 서러워지고 눈물이 나서 소리 안나게 울면서 밥을 했대요.
밥 먹는데 여자가 재수없게 운다고 할까봐 소리도 못내고...
친정에서는 밥할 때 독에 보리쌀이 없어 눈물이 났는데 여기서는 쌀이 많아도 울 일이 생기네...
이러면서 참았다네요. 국민학교 다니면서 등록금 안낸다고 선생님이 때릴때도....
개 팔아서 준대요..... 오디 팔아서 준대요...... 하면서도 안울었는데.....
쓸데없는 짓 한다니까 눈물이 막 나더래요.
아버지가 미안해하는 눈치였지만 대꾸도 안하고 밥 하고 밥상 치우고 열심히 9자말이를 더 했는데
아버지가 내일 어디 가자고 하더랍니다. 바람쐬러 나가자고... 그게 나름 미안함의 표시라네요.
미숙씨는 2년 더 살다가 친구가 결혼하면서 더 싼 집을 찾아 이사를 나갔고
이사 나가는 날 트럭 틈새에 세숫대야가 들어가지 않아서 우리 집 세수대야랑 바꿔서 그 안에
화장실 짐을 좀 담아서 이사를 나갔는데 나중에 꼭 대야 가져다 준다고 하더니 그 이후로 소식이 없대요. 이사나가면서 봉숭아 꽃까지 야무지게 따 갔다고 어디서든 잘 살고 있을거라고 합니다.
(우리집 세수대야는 새거였대요.)
참 저희 엄마는 로미오와 줄리엣 개봉했을 때 올리비아 핫세가 우리 엄마를 닮았다고 했었답니다.
코 빼구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