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낙랑 클럽 ㅠㅠ김활란 찐친일파 진짜 너저분하게 더러운 여자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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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수립 직후인 48년무렵부터 6.25가 끝나가는 52년까지 한국의 여대(女大)출신 여성들로 조직돼 주한외교사절.미국 고위관리.미군 고위장성 등을 파티에 초대,접대하고 정보를 빼냈던 「낙랑(樂浪)클럽」의 실체가 처음 문서로 확인 됐다.

 

中央日報社 현대사연구소 사료발굴팀이 최근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가 비밀해제한 문서 가운데 한국관련 자료를 긴급 입수,분석한결과 개인에 대한 정보수집문서인 「모윤숙(毛允淑)파일」에서 이같은 사실이 확인됐으며 『月刊中央』2월호는 이를 단독보도했다. 이 문서에 따르면 낙랑클럽은 48년께 시인이자 정치인이였던 모윤숙의 주도로 결성돼 국내 某여대 출신의 용모단정한 영어가능자 1백50여명을 회원으로 두고 주로 주한외교사절.미국 고위관리.미군고위 장성 등을 위한 접대행위를 했으며,이 과정에서 얻은 정보들을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은 미국측과의 협상에 이용했다는 것이다. 

 

낙랑클럽에 초대받은 유명인사로는 덜레스 美국무장관,무초 주한美대사 그리고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밴플리트 美8군사령관,콜터장군 등이었다. 中央日報社가 입수한 미군방첩대(CIC)의 한 문서는 낙랑클럽의 실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낙랑클럽은 서울에 거주하는 여성들에 의해 48년이나 49년께 사회단체로 조직됐다.이 단체의 목적은 외국귀빈.한국정부 고위관리및 미군장성.주한외교사절 등을 접대하기 위한 것이다. 이 단체의 회원은 한국의 某일류 여대를 졸업한 교육받은 여성들에 주로 국한됐다.이들은 대개 영어를 할줄 아는 매력적인 여성들로 교양있는 호스티스였다.

특히 부산피난 시절에는 송도(松島)돌산위에 세워진「시 사이드 맨션」등이 파티장으로 이용됐다. 이 클럽을 앞장서 조직하고 이끌고 있는 사람은 YWCA총재이자 저명한 시인이다.그녀는 51년12월 유엔총회 당시 소련외무장관 비신스키를 열렬히 포옹한 적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낙랑클럽 회원들은 기혼.미혼.무직.직업여성등 다양한 인적구성을 보이고 있으며 초기에는 회원수가 1백50명에 달했다.외국인접대행위는 몇몇의 경우 외국인의 정부가 되는 일로 발전되기도 했다.실례로 낙랑클럽 조직 구성에 참여했던 한 여성은 부산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영관급 장교의 정부노릇을 했다.』 

 

이 문서는 또 낙랑클럽의 활동에 대해『부산 피난시절에도 미군들을 상대로 접대행위를 계속했는데 부산주둔 미국의 한 관리는 이 클럽 회원들이 심지어 軍막사에까지 들어오고 있다고 전했다』고 덧붙였다. 문서는 52년12월24일에 발행된 미국 샌프란시스코 인근 데일리 팔로 알토 타임스紙의 기사도 인용하고 있다. 

 

이 신문의 에니너 스폴딩기자는 당시 낙랑클럽의 활동무대였던 부산을 직접 방문,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한국에서 가장 전설적인 여성은 한국 여성 2백명을 주한외교관등을 접대하기 위해자유당의 접대부로 조직한 시인이자 정치인 모윤숙 이다.모윤숙 덕분에 이승만대통령은 유엔사령부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사전에 알 수 있다. 부산에 있는 낙랑클럽의 지도부는 사회적인 지위와 명성을 갖춘중년여성들로 구성돼 있으며 이들은 군장성과 외교관들을 위해 항상 파티계획을 세우고 있다. 어느날 밤 파티에서 한 젊은 참석자가 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10년은 더 나이 먹은 여성이 접대하러 나오자 화를 내면서 항의했다.그러자 15분안에 한국정부 고위관리가 젊은 낙랑회원을 대동하고 나타났고 나이먹은 낙랑회원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낙랑회원들은 두가지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밤에는 한복으로 곱게 차려입고 불빛을 받으며 고위관리들을 접대하고 낮에는 한국군을 접대하기 위한 물품들을 구하기 위해 미군막사의 문을 노크한다.』 미군방첩대는 그러나 또다른 보고서에서『낙랑클럽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이용되고 있다고 여겨지며 간첩혐의로 체포돼 처형당한 한 인물은 낙랑클럽의 적극적인 회원이었다』며 용공혐의점을 두고『유엔관리들로부터 경제.정치등의 정보를 입수,한■ 정부에 전달할 수 있고 공산주의 첩자가 침투했을 가능성등이 있기 때문에 미국의 국익에 위험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방첩대는 결국 수사를 하지 않고 53년11월 사건을 종결하는데 그 이유는 낙랑클럽의 해체와 함께 공산주의자들에게 이용당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방첩대가 내세운 또다른 이유는 수사가 시작될 경우 이를 불쾌 히 여긴 한국정부가 그동안 낙랑회원들을 통해 수집한 유엔관리들의 사생활 정보를 폭로할 가능성이었다. 

 

방첩대 보고서는 52년12월 낙랑클럽이 해체됐다고 적고 있다.이로써 밀실외교를 담당했던 낙랑클럽은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은채 역사속으로 묻혔으나 당시 최고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외국 외교사절.군인접대에 조직적으로 나서야했던 상황은 그늘진 역사의 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金祥道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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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본문 중 <이 단체의 회원은 한국의 某일류 여대를 졸업한 교육받은 여성들에 주로 국한됐다.>

김활란의 입김이 없었을 리가

 

무려 중앙일보 기사가 증언을 해주는데 이대 총학은 뭔 입장문?

졸업생으로서 쪽 팔린다.

그리고 여성계도 그냥 가만히 있어라!!  

 

이를 뒷받침하는 논문도 있음

https://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929079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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