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
구식 아파트에서 나름 평범하게 자랐다.
유치원도 다니고, 수영도 배웠다.
기억나는 건 아버지가 성인 밥그릇만한 비빔밥을 남겼다고 버릇을 들인다며 매질했던 것.
물론 나에게 양을 물어본 적은 없다.
울면서 1시간 동안 그릇을 붙잡고 꾸역꾸역 먹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생>
입학하자마자 반 1등을 하고 반장이 됨.
IMF가 터지면서 아버지 실직.
다세대 주택으로 이사갔다.
아버지가 툭하면 어머니의 머릿끄댕이를 잡고 폭력을 휘두름.
집이 좁아서 방음이 전혀 되지 않았기에
오빠랑 둘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덜덜 떨다가 뛰쳐나가서 말리곤 함.
나는 다니던 피아노 학원을 그만뒀고
아버지는 사업을 한다고 가게를 차렸으며
어머니는 맞벌이를 시작했다.
어머니가 맞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일당 3만원 짜리 마트로 일하러 가던 모습,
부업을 시작했다며 물감과 종이를 잔뜩 집에 늘어놓더니
결국 한푼도 받지 못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오빠는 엇나가기 시작했고
부모님이 집에 안계신 사이 나를 화풀이로 때리기 시작.
살려달라고 엄마나 아빠에게 전화하면 일하는데 방해한다며
집에 와서 둘에게 공평하게 매질을 함.
나는 여전히 성적이 좋은 편이었지만
알고보니 반장은 운동회날 햄버거를 쏠 수 있는 애들이 한다는 걸 알았고,
그때부터 나는 어디에도 나서지 않았다.
<중학생>
아버지의 가게가 쫄딱 망하고
쓰러질 것 같은 다세대주택으로 이사감.
내 방 문이 없고 얆은 커튼으로 구획만 나눠져 있었는데,
가족들 발소리나 쩝쩝대는 소리, 변기 물 내리는 소리 등이
너무 크게 들려서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 됨.
층간소음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말을 이해하게 됨.
아버지는 교육 사업인지를 한다며 계속 돈을 가져다 썼고
오빠는 나를 더 자주 때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얻어온 작은 말티즈까지 때리기 시작했는데
늘 집에 혼자 갇혀있는 개가 너무 가여웠던 기억에
나는 지금도 강아지 봉사를 가끔 간다.
나는 학교에서 여전히 1등을 했지만 전교 10등 안에는 들지 못했다.
아버지는 친구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보습학원에 나를 무료로 다니게 했는데
거기서 나는 가장 성적이 좋았지만 이상하게 원장이 날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때는 이유를 몰랐다.
3년 내내 돈을 한 푼도 내지 않고 교재도 공짜로 받는 게 얼마나 신세를 지는 일인지.
또 사실 원장은 아빠의 친구도 아니고 사업을 잠시 같이 하다가 쫑난 사람이었다는 것도 몰랐다.
고민 끝에 학원을 그만둔다고 말했을 때 "그럴래?" 하고 환하게 웃던
원장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고등학생>
아버지의 사업은 역시 쫄딱 망하는 것으로 끝남.
아버지 생일 날 모아둔 용돈으로 선물을 고르려 돌아다녔는데
집에 늦게 들어왔다고 엄청나게 매를 맞았다.
며칠 뒤 아빠는 집을 영영 나갔고,
나는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없는 집에서 오빠는 폭군으로 군림했고
엄마랑 매일 소리를 지르면 싸워대는 바람에 신고가 3번 정도 들어왔다.
내 성적은 여전히 최상위권이었지만
우리 동네는 정말 지지리도 못사는 동네여서 전국 모의고사로는 경쟁이 되지 않았다.
반 친구 한 명이랑 하교하다가 우연히 걔네 어머니를 만났는데
가슴이 훤히 보이는 분홍 끈나시를 입고 빨간 염색을 하고 있었다.
한 친구는 아버지가 시각 장애인이었고,
다른 친구는 집에 가면 설거지와 빨래, 청소, 저녁밥을 도맡아 해야 했다.
나는 수시로 서울 상위권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생>
왕복 4시간 거리를 매일 통학해야 하는 문제가 생겼다. 늘 피곤했다.
주말에는 서빙 알바를 했다.
시급은 4500원 정도였는데 교통비와 식비, 교재비 등을 빼면 남는 게 없었다.
좋은 대학에 가니 친구들은 사는 수준이 달랐다.
그리고 못사는 동네 친구들보다 훨씬 영악했다.
내 동네 애들은 욕을 입에 달고 살고, 불법 알바를 하고, 배달음식에 침을 뱉는 부류의 나쁜 짓을 했다.
대학 친구들은 대체로 잘 살고 세련되고 잘 자란 친구들이었지만
왜소한 복학생 선배가 길에서 음식을 먹으면서 걸어가자 "찐따 같이 왜 저러냐, 없어보인다"며 손가락질을 했다.
나는 내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게 됐고, 대학에서 조금 겉돌았다.
아빠에게 연락이 와 만났더니,
"니가 열심히 하지 않고 이상한 애들이랑 어울려서 서울대를 못 갔다, 한심하다" 고 했다.
그 동네는 매일 술담배나 하는 애들이 채일 정도로 많았는데, 학군을 정한 건 내가 아닌데?
참고로 아버지는 전문대를 뒤늦게 나왔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다.
23살 됐을 때 쯤,
오빠가 여느 때처럼 날 때리려 하자 경찰에 신고를 했다.
경찰이 오자 오빠는 방에서 나오지 않고 덜덜 떨었고,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경찰에 빌었다.
나는 누구도 나를 때릴 권리가 없다는 걸 23년 만에 알게 됐다.
그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취직>
대학교 취업반에 들어갔는데 과제량이 어마어마하게 많음.
아침저녁으로 출석 체크를 해서 못 지키면 쫓아냄.
어머니에게 자취를 해야 한다고 울고 불고 떼를 썼더니
방 하나를 알아와서 보여주셨다.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15만원.
정말 말도 안되게 음침하고 '방이 썩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는데
어머니는 "어때? 너무 좋지? 너 때문에 할아버지한테 300이나 빌렸다"며 생색을 냄.
6개월 쯤 살다가 도저히 못하겠어서 한 선택은,
도서관에서 사는 거였다.
먹고 자고 모든 걸 도서관에서 . 딱 씻을 때만 집에 갔고 과외 뛰고 다시 서울에 왔다.
그렇게 난 적당히 좋은 기업에 취직을 했다.
<그 이후>
취업을 해서 3000만원을 모으자마자 나는 독립을 했고,
단 한 번도 예전의 집을 가지 않았다.
오빠는 연락처도 모르고 어머니는 반년에 한 번 정도 연락한다.
이제 나는 나만의 방에서 평화롭게 잠을 잔다.
우리 부모님이 평생 지내던 집의 매매가보다 전셋값이 더 비싼 원룸에 산다.
나는 한번도 가본 적 없던 일본을 가보고,
명품 가방도 사보았다.
가끔 치킨이 먹고 싶으면 고민 않고 배달 시키고,
한 시간에 5만원이 넘는 PT를 받기도 한다.
회사에 공헌을 해서 상을 받기도 하고,
잠시만마 연애도 해봤다.
한편으론
끝을 알 수 없는 공허함을 느끼며 뒤척거리고,
어린 시절의 악몽을 꾼 뒤 울면서 잠에서 깨기도 한다.
가끔 "너 어디 고등학교 나왔니? 무슨 동?"을 집요하게 묻다가
내 대답을 듣고는 비릿한 미소를 짓는 사람을 마주하기도 한다.
선배들은 소개팅을 해주겠다면서
"사람은 가정환경이 제일 중요하다", "여자는 어머니와 같은 인생을 산다" 같은
애기를 한다.
나는 단 한번도 소개팅을 받지 않았다.
나는 비혼인 것 같지만 사실 결혼을 하고 싶은데 자신이 없어 못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내 사정을 솔직하게 말할 자신이 나지 않는다.
가난은 이해해주지만, 고아나 다름없는 가족관계는 이해해주지 않더라.
지금 내 모습은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어릴 때 꿈꾼 탈출구의 모습은 이런 거였을까.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토요일 저녁, 집에서 혼자 맥주를 들이키다가...
이런 저런 생각이 들어서요.
가끔 82쿡을 오는 30대 흙수저가 적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