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공유)'순종을 사육 동물로 전시하라’…이토 히로부미의 ‘창경원’ 프로젝트[이기환의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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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기사여서 뒷부분만 긁어왔어요.

■순종을 투명그릇에 가둬 전시했다?

‘원(苑)’자의 본뜻이 ‘울타리를 쳐서 짐승과 나무를 키우는 곳’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창경원 조성을 기획한 고미야가 평소 소름끼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조선병합에 대해 외국에서 일본이 이왕가를 후히 대우하고 있음을 모르는 자가 많다. 왕가의 실정을 알려야 한다. 창덕궁(창경궁 포함)은 ‘투명한 유리그릇에 넣은 물체’처럼 명백하게 누구에게라도 보이는 것이 좋다.”( )

고미야 등은 “일본이 이왕가를 얼마나 후히 대우하고 그들이 얼마나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지 외국인들의 오해를 푸는데 커다른 효과가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아니 순종을 ‘투명한 유리그릇에 넣은 물체’처럼 전시한다는 게 무슨 이야깁니까.

‘순종을 창경원 사육장(유리그릇)에 넣은 동물(물체)’로 취급했다는 것이 아닌가요. .

그렇지 않아도 반대의 목소리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유서깊은 궁전 건물을 박물관으로 조성해서 불상과 고기물, 시체를 넣었던 관곽마저 진열하고 일반인들이 흙묻은 발(土足)로 출입케하는 일이 말이 되냐”는 여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그와 같은 여론을 일축했습니다.


창경원 조성 건설을 책임진 고미야 미호마쓰는 “조선병합 이후 외국에서 일본이 이왕가를 후히 대우하고 있음을 알게하는 게 중요하다. 실정을 알려야 한다”면서 “따라서 창덕궁(창경궁 포함)은 ‘투명한 유리그릇에 넣은 물체’처럼 명백하게 보이는 것이 좋다.”고 강조했다.


■밤벚꽃놀이, 일탈의 장소로 전락한 ‘창경원’

그렇게 개방된 창경원은 갈수록 태산이 되었습니다.

일본 본토에서 산업 시찰단과 수학여행단이 몰려들었구요. 일제의 의도대로 외국인들의 관람도 이어졌습니다.

1918년 무렵부터는 그 유명한 벚꽃놀이가 ‘창경원’에서 시작됩니다. 서울에 머물던 일본인이 1908~9년 사이 창경궁 등에 심은 벚꽃나무가 화려한 꽃을 피운 겁니다.(1939년 4월 16일 매일신보)

창경궁은 그때부터 해마다 4월이 되면 ‘놀이동산’으로 전락하게 되죠. 급기야 1924년 봄부터는 ‘창경원 밤벚꽃놀이’(야앵·夜櫻)가 시작되구요.


이제는 순종을 ‘창경원의 사육장(유리그릇)에 넣은 동물(물체)’로 취급했다. 고미야 미호마쓰의 글에 적나라하게 나와있다.
“창경원 동물원의 울타리를 이룬 벚꽃가지에…꽃봉오리가 맺기 시작…해마다 꽃이 필 때마다 밤에도 열어달라는 여론이 많았다…금년 봄 벚꽃이 만발하는 2~3주일간 야간개장하고 수천개의 전등을 장식할 계획….”(동아일보 1924년 3월11일)

“모두 마음이 들떠서 야앵! 야앵! 말하느니 야앵이요, 가느니 야앵이라. 분을 한껏 바르고 향수를 뿌린 모던 걸에게 장난을 걸 때 양복 친구들의 시선은 으슥한 곳으로 혹은 젊은 여자들의 다리로 꽂혔다.”( 1930년 5월·1933년 4월)

창경원은 일탈의 장소로 전락하고 만 겁니다. 그나마 순종의 생전에는 매주 목요일에는 휴장되었습니다.

순종의 산책 겸 관람일이라는 이유였죠. 그러나 순종이 서거한(1926년 4월 26일) 이후인 1927년 7월1일부터는 창경원 전체가 연중무휴로 개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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