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나는 책 읽는 아빠 모습이 오늘만큼 경멸스러웠던 적이 없어

무척 오랜만에 본가에 내려왔다 깜짝 놀랄 소리를 들었다. 우리 엄마가 책 한 권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교양 없고 무식한 아줌마란다.

엄마가 이북 리더기를 사고 싶다 말을 꺼냈다가 아빠한테 한소리를 들 었다. 어차피 읽지도 않을 책에 무슨 돈 낭비를 하냐고. 아빠가 거실에 반쯤 드러누워 책을 읽을 때 엄마는 부엌에서 호박전을 부치고 있었다.

"저번에 산 책 못 끝냈지? 읽지도 않을 책 왜 샀어? 책은 언제 읽을 래?"

응, 다 못 읽었지. 주중에는 일하느라 바빠서. 주말에는 빨래도 널고, 쌓 인 설거지도 하고, 청소기도 돌리고, 장도 보고, 밥도 차리고, 분리수거 도 하고, 옷도 다리고, 화장실 청소도 하고, 반찬도 좀 만들고, 겨울이 다가오니 옷 정리도 하고. 그러고 나면 책을 읽어야 하는데 말이야. 삭 신이 쑤셔서 전기장판 위에 엎드리면 왜 다들 잘 시간이라는 걸까? 파 스 냄새가 쓰게 올라오는 손목으로 이제 막 페이지를 넘기려는데 책을 읽어야 하는데 왜 그렇게 잠이 올까? 응, 왜 그렇게 잠이 올까?

딸. 엄마가 학창시절 오만 백일장에서 받아온 무수한 상장들이, 하루 내 미싱을 돌리다 집에 오면 다 헤진 가방에서 꺼내읽던 '바람과 함께 사라 지다'가 나를 엉엉 울렸던 '파리의 노트르담' 속 문장들이 다 어디 갔을 까?

엄마, 아빠가 제일 잘 알아. 아빠는 모르는 척하면 안되지. 아빠가 엉덩 이 붙이고 앉은 반짝반짝 광나는 거실 바닥 아래 묻혀있어. 세탁기 안에 서 세제랑 같이 녹았어. 설거지할 때 음식물 찌꺼기랑 같이 쓸려 내려갔 어. 아빠 셔츠 다림질할 때 증기랑 같이 날아갔어. 아빠가 호박전을 입 에 넣을 때 같이 먹혔어. 아빠. 배부르고 편하지? 집에 오면 늘 깨끗하 니 기분 좋지? 매일 쓰는데도 물때 하나 안 끼는 화장실이 마법같지? 절대 넘치지 않는 쓰레기통이 신기하지? 그거 마가렛 미첼이 그런거야. 빅토르 위고가 그런거야. 브론테 자매가 그런거야. 다들 집안일 하느라 엄마를 떠난거야.

엄마. 엄마는 근 25년을 거실 한가운데서 어떻게 살았어? 다들 제 할일 한다며 자기 방에 들어갈 때 엄마는 문 밖에 혼자 어정쩡하게 앉아서 어 떻게 25년을 버텼어? 엄마한테 선물하려고 책을 잔뜩 샀어. 엄마방 다 시 찾아가. 가서 까뮈도 데려오고 버지니아 울프도, 헤르만 헤세랑 도스 토옙스키도 다 다시 데려와 엄마.

엄마. 나는 책 읽는 아빠 모습이 오늘만큼 경멸스러웠던 적이 없어. 엄마. 나는 내가 문학을 공부한다는게 오늘만큼 죄스러웠던 적이 없어. 엄마. 밤새 책 읽는 나를 보며 결혼 안해도 되니 엄마처럼 살지 말라던 게 이런 의미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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