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관계에도 유통기한이 있었으면

오늘 일기장에 쓴 글인데 그저 답답한 마음에 위로 받고 싶어 82에 올려요. 일기라 다체로 끝나는 점 양해 해주세요. 


우매보시, 땅콩 버터, 과일 치즈, 연유...오랜만에 냉장고를 정리하다 보니 유통기한이 지나버렸다.

먹고 싶어서, 필요해서 산 것들이지만 기대했던 맛이 아니어서, 느끼해서, 더 이상 필요가 없어서 잊혀졌고 결국 버려진다. 환경과 비용을 생각할 때 잠시 불편한 맘이 들지만 유통기한이란 명확한 기준이 있으니 면죄부를 받은 듯 내 기억에서 지울 수가 있다.

문득 내 주변에 힘든 관계, 내 기대에 못 미치는 관계, 때로는 만나서 괴로운 관계 등 사람과의 관계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어떨까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부부 관계에서.

큰 아이 대학 입학 후 오랜만의 가족 외출이었다. 미세먼지로 흐린 날씨지만 마치 봄이 온 듯 포근한 날씨다. 내 맘은 설레지만 팔짱을 꼭 긴 채 도란 도란 걸어오는 딸 둘과 비교하면 우리 부부는 그저 무미 건조하기만 하다.

평소에도 거의 말수가 없는 남편은 오직 걷기에만 열중한다. 점심 과식이 부담스러워 운동으로 배가 꺼지길 바라며 열심히 걷는다. 뭐라도 화제를 올려 이야기 거리를 만들고 싶은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

남편과의 외출은 늘 이렇다. 등산을 가도 오직 정상을 정복하는 목표에만 관심이 있다. 가는 도중에 대화 따위는 안중에 없다. 동네 산책을 가도 오늘 못 걸은 만보를 채워야해서 걷기 바쁘다.

남편은 늘 앞서가고 나는 종종 걸음으로 따라가며 뭐라도 주저리 주저리 말을 붙여보지만 대화는 아니고 그저 응, 아니 하는 대꾸 뿐이다.

그러다 아이들이라도 합류하면 남편 얼굴엔 웃음이 차고, 아이들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하고 농을 걸기도 한다.

난 그런 남편을 보면서 마치 내가 집의 가구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내게 이젠 특별한 관심이 없는 사람. 그런 관계.

난 아직은 남편의 관심과 애정을 원하지만 그는 더 이상 그럴 맘이 없어 보인다. 그는 가정을 소중히 여기지만 우리 사이에 특별함은 이미 사라졌다. 마치 필요해서 샀지만 더 먹고 싶지 않아 두었다 유통기한이 지나 버린 냉장고 음식 같은 사이.

부부 사이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단호하게 끝낼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이미 시어지고, 더 이상 맛이 없어 먹고 싶지 않지만 버릴 수 없는 관계 같은 부부. 유통기한이 있어 버리고 비운 자리에 새로운 쇼핑을 해서 채워도 미안하지 않은 관계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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