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의 이 영화에 대한 욕망
''현대에 만들어진 사랑에 관한 영화들은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데 아주 대담하죠
그래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 자기 생각을 아예 숨기거나
본심과 반대로 표현하거나 또는 돌려 말하거나
그런 식으로 감정을 숨긴 사람들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사랑하는 관계란?
''인간이란 원래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살지만
이런 여러 관계들 중에서 인간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그 개인, 인간이란 종족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제일 잘 보여줄 수 있는 관계는
사랑하는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고전적이고 우아한 사랑 얘기를 만들고 싶었어요
순수한 영화를 하고 싶었죠
이번 영화는 감정표현이 노골적이지 않은
손짓, 눈빛 하나에 많은 것들이 담겨 있고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지 앟는 그런 영화를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감춰진 속마음을 관객이 유심히 생각하게 만들려면 이렇게 표현해야겠다 싶어서 결정한 거죠
대놓고 들이대기보다 관객 스스로 들여다 보고 싶게 만드는 영화를 하고 싶었어요
지금은 너무 이기적이고 세속적이고 경박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시대예요
어떤 멸종 동물처럼 보기드문 기품을 가진 사람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 사람이 어떻게 붕괴되고 품위를 잃어 버리느냐
또 그 과정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가를 영화에서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이 영화에서 감독 말처럼
서로 감정을 숨기고 가면을 쓰는 관계에서
그들의 본질적 존재감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감상하는 것이
우리의 몫인 듯 하네요
박찬욱 감독이 이 영화는 '성숙한 남녀의 인내하는 사랑이야기' 라고 정의내리는데요
진짜 어른들의 사랑이야기, 희귀한 종족들의 사랑이야기라고 표현을 하는데
사실, 주인공들의 품격이 없었다면 애초에 이런 스토리는 가능하지 않죠
평생의 가치관과 신념이 붕괴될만큼 사랑은 거대했지만 대단히 정제되어 있는 태도가 인상적이죠
서래가 사랑에 빠지는 것을 표현하는 것도 남다른데요
아이스크림을 천천히 먹으며 생각에 잠기는 것
사랑이 달콤하게 스며드는 느낌을 음미하는 듯 합니다
사랑에 빠질 때도, 사랑할 때도
이별을 고할 때도, 서로의 반응은 절제되어 있고 고요합니다
이별 후, 402일을 무한히 인내하며 연락도 없이 이포로 가고
그러다 사건으로 의도치 않게 엮이며
자신의 결백을, 사랑을 구구절절히 설명하지도 않는
그냥 진심을 알아봐주길 바라며 자신의 방식대로 표현합니다
해준이 불신으로 정색을 하며
''당신은 그래봐야 피의자예요''라는 말에 서래는 잠시 절망하지만 곧 미소를 띄우며 ''나, 그거 좋아해요
편하게 대해주세요 늘 하던대로''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말을 덧붙여요
''이걸로 재수사해요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요''
당신의 가치관을 지켜주기 위해, 내가 모든 걸 희생하겠다는 말이죠
서래에게 해준은 믿을만한 남자예요
해준에겐 현대인답지 않은 품위
자신만의 원칙, 꼿꼿함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이것은 서래가 독립군이었던 외조부로부터 정신적으로 이어받은 품격이 있었기에, 해준의 품위에 깊이 감동했고 그래서 서로 깊이 좋아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녀에게 그런 품격이 없었다면 위와 같은 대화는 불가능 했을거예요
그런 건 그냥 눈감고 사랑해달라고 매달렸겠죠
실제로 그들이 데이트할 때 해준은 서래에게
당나라에서 왔냐고 묻고 있어요
현대인같지 않다는 것이죠
서래는 해준에게 현대인치고는 품위가 있다고 말을 합니다
서로에게 같은 평가를 하고 있어요
이 둘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
꼿꼿함과 품격이 있는 감독말대로 희귀한 종족이었고
반면, 해준의 아내는 감성 메마른 이과, 몸의 사랑이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는, 스테미나를 중시하는 현대인의 표피적 사랑
자라 탈주사건, 자라와 석류를 양 손에 들고 가는 해준의 아내를 통해 감독만의 유머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감독말로는 영화 안에 여러 유머코드가 있는데
관객들이 웃지 않아서 자기가 너무 상처받았다네요
예를 들면, 독한 것이라는 대사에서 아무도 안 웃어서 크게 상처 받았다고ㅎ
인터뷰 보다가 여운이 남아서 얼마 전 영화를 다시 봤는데요
그동안 안보이던 시점도 보였는데요
예전엔 해준의 속마음은 이 여자가 날 사랑한다는 걸 알지만 도덕적 잣대때문에, 모르는척 냉혹하게 대하는 걸로 생각했는데요
그게 아닌거 같아요
알고 계시는 분도 많을 것 같은데
해준은 이별 이후부터, 서래가 자기를 이용했다는 관점을 견고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자기를 이용하고 시험해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계산적인 여자로 보고 있어요
사실, 이포에서 다시 만나고 서래를 대하는 태도가 이해가 안될 만큼 심했거든요
이 관점으로 보니 다 이해가 돼요
내가 만만하냐며 화도 내고, 호미산에서도 절벽에서 서래가 자기를 밀까 봐 가슴을 쓸어 내리고
해준은 그녀를 불신했고 서래가 자신을 깊이 사랑한다는 걸 전혀 몰랐던 것 같아요
자기만 그녀를 사랑했고, 그런데 농락당한 것 같고, 그래서 펄펄 뛰고 맹렬히 서래를 다그쳤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준의 마음 깊이 여전히 사랑은 있었죠
이중적 프레임 안에서 정신적 갈등이 극심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모든 마법은 서래의 죽음을 통해 완전히 사라집니다
이포로 이사온 이후 자욱했던 안개가 완전히 걷혀요
서래가 바다에 묻히고 해준이 바로 그 위에서 서래가 녹음한 자신의 음성을 들으며 모든 환상에서 깨어납니다
불신이라는 생각의 게임에서 깨어나 깊이 절망하죠
이용하려했던게 아니라 정말 사랑했던거구나
모든 말, 행동들, 사랑에서 나온거구나 그런 깨우침
그리고 운동화 끈을 질끈 묶어요
이 장면에 대한 박해일의 멘트가 가슴에 와닿았는데요
이 장면을 연기할 때, 문득 서래와 절에서 데이트할 때가 떠올랐다고 합니다
절계단에서 끈이 풀린 해준의 운동화를 보고 서래가 묶으라고 했죠
그 달콤했던 시절의 그녀는 허망하게 사라지고 없는데, 어둑한 바닷가에서 홀로 남겨진, 뭔가 울컥하는 마음이 전해지더라구요
해준의 시점으로 들어가보니, 엄청난 충격이고 감당하기 힘든 감정상태였다 싶은데
박해일씨는 이 장면이 감정연기에서 최고봉으로 힘들었던 장면이라고 하는데요
그 바닷가 모래 사장 위에서
완전히 오해했던 그녀의 말, 행동들이 모두 사랑으로 돌려질 때, 그 감정선에서 바닥모를 붕괴를 진하게 함께 느껴볼 수 있어요
과연 무엇이 중요했던가...에 대해
사랑하는 관계안에서 가장 깊은 감정을 건드리고
그것이 외부로 표현되는 모든 과정들
만약 서래가 어떤 이끌림으로 이포에 가지 않았다면
해준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농락당했다는 생각으로 평생을 보냈을거라 짐작되는데요
아무리 서래가 어떻게 설명해준다고 해도, 해준으로선 의심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서래는 결국 자신의 죽음으로 해준에게 진심이라는 선물을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이용당했다는 수치심과 분노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해주고 깊은 사랑을 남기게 된 것 같아요
죽음으로 순수한 마음을 증명하는
감독은 관객들에게 한국어로 이해하는 지극히 한국적 정서의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여드리고 싶어서 공을 들여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영화에 섹스와 폭력을 덜어내니, 의외로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정서에 더 깊이 집중하더라는 말을 합니다
그 전략은 주효했던 것 같아요
한 번으로는 결코 파악하기 힘든 텍스트를 던져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몇 번을 보게 만드는데요
무슨 매력일까싶기도 한데
어쩌면 한 번 쓰윽 보고 버리는게 아닌
좋은 책처럼, 두고 두고 꺼내서 여러 번 보게 만드는
하나의 작품, 마스터피스같아요
꺼내어 볼 때마다 내면에서 가치 있는 의미들이 생성되는
그러니까, 진짜라는게 무엇일지 생각해봐 이런 화두를 던지는 듯 합니다
영화가 끝나면, 그것을 본 사람의 수만큼
각자의 내면 안에서 그 영화가 다시 상영된다고 하는데요
더 깊고 풍부한 영화감상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