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오래 전 남자친구가 사 주었던 선물

오래 사귄 남자친구가 있었어요.
대학 입학 전에 만나서 서로 중간에 휴학하고 어학연수하고… 그런 대학 생활을 함께 보내고
졸업하며 헤어졌죠.

몇 번이나 함께 보낸 서로의 생일, 기념일, 크리스마스, 연말, 봄, 여름, 가을, 겨울.
잊고 살다가 문득 어떤 이유로, 아니면 아무 이유 없이 생각날 때가 있어요. 시간의 혜택을 입고 대부분의 기억은 그저 고마웠거나 귀여웠거나 … 뭐 대충 그런 색으로 칠해집니다.


얼마 전에는 문득, 어느 해에 받은 생일 선물이 생각났어요.
저에게 뭘 갖고 싶냐고 물어보더군요.
저는… 책 열 권을 받고 싶다고 했어요. 책을 아주 좋아했거든요.
등록금을 스스로 벌어서 다니느라 여유가 없어서 책을 마음껏 사 읽지는 못했고요.
물론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도 되지만
‘내 책’이 많지 않은 책벌레 이십 대 초반은 늘 책에 굶주려 있었던 거죠.

생일이었나 생일 전날이었나…
같이 대형 서점에 갔어요.
저는 서가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평소에 읽고 싶었던 책들을 들춰 보고 한 권씩 골랐죠. 아마 제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고 있었을 거예요 ㅋㅋ 발에 날개가 달린 것 같았고 책들이 저마다 자길 데려가라고 저에게 말을 걸어왔죠.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한꺼번에 다섯 권쯤 사? 아니면 각각 다른 작가들의 대표작을 살까? 아니아니 이 작가는 작품이 전집처럼 예쁘게 새로 묶여 나오고 있던데 그 중에서 몇 권을 골라볼까?
머리 속에서 책들의 위시리스트가 합창을 하고 저는 행복한 고민을 하면서 리스트를 휙휙 넘겼어요.
고민은 치열했지만 또한 너무나 좋아하는 작가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았죠.

서가 사이사이를 다니며 책을 고르면, 뒤따라오던 남자친구가 그 책을 들어 주었어요. ㅋㅋ 한 권, 두 권, 세 권… 결국 열 권을 채울 때까지.
와- 그 순간은 말이죠… 수행원을 데리고 명품관을 도는 재벌 아가씨 부럽지 않았어요.
안 먹어도 배부르고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던 그 때.


많이도 싸우고 많이 울고 서로에 대한 기대치와 행동이 서로 맞지 않아 무슨 기념일에 평소보다 더 다투고 ㅋ
전쟁같은 몇 년을 함께했지만…
좋은 기억이 많이 남아 있어요.
제가 뭘 좋아하는지 늘 관심 가지고, 챙겨 주려 하고(이런 남자가 많지 않다는 걸 그땐 몰랐어요). 자기는 관심도 없는 시인을 제가 좋아한다고 했던 걸 기억하고
새로 나온 책을 사다가 별일 없는 어느 날 주고.
기나긴 산문시를 제가 외웠다고 좀 들어 보라고 하는 걸 (꾹 참고 ㅋㅋ) 어이없어 하면서도 끝까지 다 들어 주고.

꽃다발을 주고는 싶은데(이유는 없음
좋아하는 여자에게 꽃을 주는 거라고 어디서 배웠나 봐요)
들고 오는 게 너무 쑥스러웠던 나머지
근처 놀이터 미끄럼틀에 몰래 감춰 놓고 저를 데리고 가서 재빨리 안겨 주던 것이라든가.


생각하니, 계속 생각나네요 ㅋ

그냥, 한 권씩 쌓여가는 책 탑을 들고 제 뒤를 든든하게 따라와 주던 모습을 말해 보고 싶었어요. 지금까지 받았던 것 중 가장 기뻤던, 가장 마음에 드는 생일선물이 아닌지.
저는 그 책들의 속표지에 만년필로 한 권 한 권 번호를 매겨
몇 년 몇 월, 생일선물
이라고 적어 두었어요. 그리고 그 책들은 지금도 제 눈앞 책장에 꽂혀 있습니다.

서툴고 괴롭고
아름답고 빛났던
이십 대를 온통 같이 보낸 사람.
이제 서로의 소식도 모르는 사이지만… 그 사람이 잔잔한 행복을 누리며 잘 살고 있길 바라요. 진심으로.









+
뜻밖에 댓글이 여러 개 달려서, 몇 개에 답만 간단히 달아야지 했는데…
우려하시는 댓글을 보니 일리가 있어서;;
(82의 글을 긁어다가 기사랍시고 쓴 괴상한 글을 한두 번 봤나요!)
이 얘긴 할 생긱이 앖었는데ㅠ 그냥 씁니다.

저는 그 후 몇 년 지나 등단했습니다.
(아… 이 글이 새벽에 그냥 갑자기 핸드폰으로 끄적거린 거라
무슨 등단한 사람 글이 이러냐, 누군가 물어뜯을까 봐 걱정되지만;;;;)

누구든 이 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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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찾아 읽는 사람들의 눈에만 보였겠지만
등단했을 때… 조금 궁금했었어요. 그 사람이 혹시 내 이름을 보았을까.
어떤 작가가 어쩌고저쩌고
어떤 걸 쓰고 싶어, 어쩌고저쩌고 얘기하던 내 이름이 사진과 함께 실린 걸 알아보았을까.
만약에 보았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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