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살면서 좋은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어요 ^^

저에겐 두툼한 수첩이 있어요
태어나서 지금껏 만난 이들 중에 잊지못할 사람들을 매해 덧붙여 기록하는 수첩이죠
한번씩 꺼내보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은행금고가 부럽지 않아요 ㅎㅎ
특히 연말이 다가오고 추워지면 수첩을 펼쳐 읽으면서 만났던 때를 떠올려봐요




- 한국인답지 않은 서양인 골격에 잘생기신 아빠, 집에서 저녁이면 큰 교자상 위에 도면을 펼쳐놓고 희한하게 생긴 각종 도구를 써가며 누군가의 집을 설계하셨던 아빠
저는 그 옆에서 같이 낙서하듯 도면을 따라그리며 나도 건축가가 되고 싶다고 하면 한국에서 여자가 하기 힘들다며 너 좋은거 하라고 하셨던 아빠
매주 깨알재미 가득한 동화책을 한권씩 사들고 퇴근하시고, 성탄절엔 캐롤을 틀어놓고 케잌과 국산 포도맛 술?을 사오셔서 꼬맹이에게 일찌감치 알콜맛을 가르쳐주신 아빠 ㅎㅎ…작은 것에도 그저 고맙다 하시고 웃는 모습도 해맑은 아이 그대로에 장난기 가득하셨던 아빠
딸이라면 껌뻑죽는, 전국 방방곡곡 데리고 다니시며 세상을 보여주시던, 유머있고 에너지 넘치셨던, 지금은 천국에 멋진 집 짓고 이사하신 아빠


- 남자아이처럼 뛰놀기 좋아하고 꾸미는거 관심없던 저와 달리 이쁘고 아기자기한 거 좋아하셔서 잠옷, 원피스 다 만들어 입히시고 빵도 유부밥도 세상에 하나뿐인 엄마표로 만들어 주셨던 여성미 그 자체셨던 엄마
허리까지 오는 저의 긴 머리를 김장할 때 쓰는 뻘건 고무다라이 한가득 적셔 감아주시고는 갖가지 머리방울과 핀 바꿔가며 온갖 헤어스타일로 만들어주셔서 아침마다 거울로 신기한 내 모습 확인하는 재미를 주셨던 엄마
겁없고 몸사리지 않는 탓에 툭하면 부러지고 깨져서 들어오는 딸래미를 몇달씩 업고 등교시켜주시기도 여러번
지금은 치매로 예전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우리딸이 최고라며 고맙다고 하시는 엄마 


- 국민학교 6년 중 어쩌다가 5년을 맡으셨던 내 인생의 담임선생님, 김ㅇㅇ 선생님!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국민학교에서 배웠다고 할 정도로 교과서 밖의 수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셨고, 국민학생이 접하기 어려웠던 신기하고 유익한 것들을 엿보고 시도할 기회를 많이 주셨던 선생님
무엇보다 책읽는 재미를 알게 해주셔서 내가 뛰놀고 날아다닐 수 있는 세상을 우주만큼 넓혀주신 선생님 
남들보다 일찍 온 사춘기로 같은반 남자애 좋아하며 왜 그런지도 모르고 끙끙댈 때 시원하게 해결해주신 선생님 
국민학교 시절을, 인생 통틀어 최고로 즐겁고 재미있던 시절로 만들어주신 선생님 


- 중학교 때 길에서 지갑을 주워서 돌려주려고 나갔는데 선물과 맛있는 간식을 사주시며 연신 고마워하셨던 어느 여자분
만나기 전 전화 통화로 (당시 남자 영어선생님께 푹 빠져서 ㅋㅋ) 영문과 갈거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는 하얗고 고급스런 표지의 영시집을 사오신 그분.. 속지에 고마움을 전하는 글에 이름까지 손수 적어서
나는 그냥 배운대로 했을 뿐인데 그 지갑이 그분께 너무나 소중한 거라면서 쬐끄맣고 어리버리한 중학생인 저를 매우 큰 일을 한 사람, 엄청나게 고마운 사람으로 만들어버리신 그분 ㅎㅎ


- 외국 살 때 한동안 몸이 안좋아 걷기도 힘든 시절, 3살 아이 손잡고 장보러 나갔다가 주차장에서 쓰러져 안경도 깨지고 대자로 뻗어 일어나지도 못하고 아이는 옆에서 울고…
그때 지나가던 미국할머니가 당신 차로 집에 데려다 주시고 침대에 눕혀주시고 남편에게 전화로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시고는 일어나 가시길래, 성함과 연락처 좀 달라고,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담백하게 노우~!하시며 나중에 너처럼 도움 필요한 누군가를 보면 그 사람을 도와주라고… 심플 덤덤하게 웃으며 빠이~하고 가신 할머니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그 사람에게 되갚는게 정답인줄 알고 살았던 저에게 뒷통수? 쎄게 치셨던 할머니 ㅎㅎ


- 아빠의 죽음을 앞두고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갔을 때 황망하면서도 슬프면서도 어떻게든 아빠의 마지막 시간들을 곁에서 지켜드리고 싶은 마음에 잠못자며 툭하면 울고 힘들어 할 때 같은 병실 보호자로 힘을 주었던 친구
한 병실에서 생명불 꺼져가는 부모님 옆에 두고 24시간을 보내다보니 초췌하고 꾸질한 모습으로 금방 동병상련이 되어 서로의 부모님도 번갈아 봐드리고 밖에서 가족들이 간식이나 커피 넣어주면 소리없이 곁에 놓고 가고..
좀 더 살아계시기를 바라는 동시에 장례며 사후 일을 가정하고 계획해야하는 이질적인 시간을 보낼 때 터무니없는 얘기로 웃기기도 하고 오며가며 한번씩 토닥임으로 나를 짓누르던 시간을 덜 무겁게 해준 친구


- 나보다 몇년 어림에도 동생보다는 친구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존대말을 쓰지만 그래도 될만큼 어른스러운, 반말을 쓰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가까운 친구
어른이 되어 친구를 만드는 건 거의 불가능에, 드문 일이라고 하는데 50살 되던 해에 이 친구를 처음 본 날, 서로 통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간파하고는 그 자리에서 만난지 10년된 친구처럼 되어버린 친구 ㅎㅎ
둘 다 집콕 스타일에 바위처럼 무거운 입을 가진 사람들인데 통화만 하면 2시간은 후딱 넘기도록 책이며 영화며 인생 얘기로 수다떨게 되고, 함께 하루종일 쏘다녀도 힘이 마르지않는.. 참 소중하고 귀해서 함부로 할 수 없는.. 그래서 감사한 친구




이 외에도 많지만 다들 저에게 살아가는데 영감을 주고, 감사를 하게 만드는 사람들이예요 
태어나 들어본 가장 쓴소리를 저에게 한 덕에 결혼까지 하게 되고 지금껏 저를 사람으로 만든 남편 포함해서요 ㅎㅎ
여러분에게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저는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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