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어쩌다 책읽는 아줌마의 어쩌다 고전 읽기^^

길어요^^
독후감이나 서평이 아닌 책읽기에 대한 이야기예요 



한동안 힘든 일도 있었고 머리 아픈 일도 연달아 있었기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어요 
꾸준히 책읽는 스타일이 아니고 한번 꽂히면 잠도 안자고 읽지만 발동이 걸리지 않으면 눈길도 안주는 스타일
영혼이 꼬르륵 소리내며 양식을 달라고 아우성칠 즈음, 참 좋은 친구가 저의 책과 담쌓은 관성을 끊고 다시금 책을 펴게 도와줬어요 
짧지만 강렬한 명작으로 스타트를 끊고 그 여운을 잇고싶어 뭘 읽을까 찾다가 눈에 들어온 ‘모비딕’ 
고전이라고는 어릴 적 다들 보는 학생용 버전으로 읽은 것들이 전부, 어른이 되어서 있는 그대로 번역된 것이나 원서로 읽은 적이 거의 없어요 
무채색 표지로 싸인 두꺼운 책을 보자마자 올 연말을 저 책의 마지막장을 덮으며 멋지게 마무리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어요 ^^


아 웬걸… 
고전을 읽으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고 등장인물들이 고래 잡느라 사투를 벌일 때 저는 책과 사투를 벌여요 ㅎㅎ
지금은 그래도 줄었지만 처음엔 페이지 한장 넘기기 전에 한숨 백번이 기본 
한줄 건너 끊임없이 나오는 모르는 단어찾느라 입 안엔 내뱉지 않은 욕이 쌓여가고, 내용 파악은 안드로메다로… 
고래의 생물학적 분류와 종류별 특징, 학자들의 의견과 각종 지식을 써놓은 것이 나오면 몸 배배꼬다 엎어져 잠들고 
소설을 읽는 건지 백과사전을 읽는 건지 철학책을 읽는건지…
그래도 인내심을 쥐어짜가며 읽다보면 한번씩 제 영혼의 신경줄을 건드리고 감탄사를 토하게 만드는 부분들이 자꾸 나오네요 
읽는게 넘 괴로운데… 힘든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붙잡고 씨름하며 읽다가 황홀함에 몸부림쳐요 ㅎㅎ


고래를 쫓아가며 솟구치는 파도에 튕기는 배들과 대양에서 오랜 세월 고래잡이를 한 선원들의 흥겹고 때론 기합같은 노래와 명령어들
앞서가는 고래가 만들어내는 하얀 포말이 양탄자 굴리듯 바다 위로  좌악 펼쳐지는 장관
고래에 작살을 던져 치명상을 입은 고래가 몸을 비틀며 마지막 숨을 쉬기까지의 고통 그리고 그것은 영웅적 승리인가 악마의 잔인함인가
온 바다를 헤엄쳐 다녀도 얼어죽거나 지치지 않게 담요처럼 고래를 감싸서 체온을 지켜주고 에너지원이 되주었던 두꺼운 고래지방을 오렌지 껍질 돌려깎듯 벗기는 작업에 대한 묘사
죽은 고래를 배 옆에 매달고 갈 때 잔치가 벌어진줄 아는 바다 고기들이 그 즐거움에 머리를 박으며 몰려들어 고래를 뜯어먹는 치열함과 선체에 전달되는 생생한 물리적 충격
거대한 몸의 작은 숨구멍으로 생명의 호흡을 하며 분사되는 미세한 물방울 위에 인장처럼 찍히는 무지개에서 인간들의 물안개같은 의문과 의심에 직관이라는 무지개가 뜨는 순간을 떠올리는 작가 
선원들을 통해 보여주는 갖가지 인간상 그리고 인간이 넘볼 수 없는 자연, 선과 악,….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흔히 말하듯 아이키우며 얻는 즐거움이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이지만 그것은 잠깐잠깐이고 대부분의 일상에서는 힘들고 지치고 신경쓰이고 얽매이는듯 답답할 때가 많다고 하죠 
이 책도 마찬가지로 좋은 책임에 분명하지만 저에겐 길고 긴 고행길이예요 ㅎㅎ (제 수준에서 그래요^^)
오죽 힘들면 어떻게든 읽어보겠다고 꾀를 냈겠어요 
막장 아닌 따뜻하고 스트레스 없고 가벼운 책 하나를 더 골라 책으로 책 스트레스를 풀어보자! (이열치열도 아니고 ㅎㅎ) 
그래서 모비딕은 숙제처럼 매일 10페이지씩 머리싸매고 읽고 다른 책은 재미가 있다보니 자기 전 침대 맡에서, 지하철에서, 마구 읽어요 ㅎㅎ
생각보다 시너지 효과가 크네요 


나이가 들면서 조금은 생각도 마음도 자유로워지고 유연성이 생기나봐요 
책도 한번에 한권만, 정자세하고 읽어야하나 하는 의문이 들면서 분단위로 쪼개서도 읽고 곁다리로 다른 책도 동시에 읽어보고
책을 얼른 끝내는 것이 다가 아니라 궁금한 것이 나오면 관련해서 찾아보고 공부하는 재미도 알게되고 (고래 공부 많이함 ㅎㅎ) 
다시 책읽기를 시작하면서 반가웠던 변화는, 살면서 산전수전 다 겪다보니 간접 경험도 직접 겪은 것처럼 상상체험하는 능력이 그 사이 커졌다는 거예요 
예전에는 경험치가 적어 나의 상상력 하나에 의존했다면 경험치가 쌓인 지금은 감각적으로 구체화하는 능력 뿐 아니라 놀라움, 두려움, 슬픔, 가슴벅참, 절실함, 막막함… 등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져서 책 속으로의 순간이동이 더 쉬워졌다는 것
그러다보니 아침엔 낯선 선원들과 한배에서 물 한방울 묻히지 않고 바닷 속 고래와 싸우며 경외감을 느끼고, 낮에는 아일랜드 바닷가에서 동네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도 하고 저녁엔 런던의 바에서 주인공의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까 같이 앉아 심각하게 고민하는…. 
그렇게 시공간을 넘나드는 즐거움, 글로벌한 비대면 사교의 편리함과 재미가 짭짤해요^^


사는거 뭐 있나요
힘들지만 재미있는거 즐기며 사는거죠 
하지만 가끔은 굉장히 재미있고 특별한 것임에도 지루하고 다가가기 힘들만큼 멋대가리 없는 껍데기를 쓰고 있어 모르고 지나칠 수 있으니 화려하고 번듯한 포장지에만 눈길을 주다 귀한 것을 놓치는 안타까운 일이 없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해요
고전읽기가 거대한 스케일과 그에 걸맞는 개고생이 따르는 일이지만 그만큼 매혹적이고 뿌듯함을 주는 일이라는걸 새삼 느꼈어요 
그 개고생에 오래 노출되면 다른 책들은 누워서 떡먹듯 쉽게 느껴질만큼 괴로움을 느끼는 센서가 무뎌지니까요 ㅎㅎ
모든 책이 모두에게 다 즐겁고 유익한 건 아니지만 뒤져보면 나에게 보물인 것들이 있는 창고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해요 
모비딕도 클라이막스를 남겨두고 있는터라 저에겐 터프하지만 알찬 연말 예약!
막바지로 치닫는 올해, 82님들도 마무리 잘하시고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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