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영주 부석사 갔다가 여우에 홀린줄 알았어요

좀 길어요^^


남편과 어제그제 1박2일 여행을 다녀왔어요 
82에서 영주 부석사 글들을 우연히 접하면서 말로만 듣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도 궁금하고 그 앞에서 바라보는 발아래 소백산이 겹겹이 달려가는 모습도 보고싶어 원래 목적지에 영주를 추가했죠 
부석사는 특히나 일몰이 아름답다고 하여 일부러 다른 곳을 들러 먹고 쉬며 가다 오후 늦게 부석사에 도착했습니다 
역시나 사과의 동네답게 둘러보는 곳곳마다 사과나무들이 그득하고 아직 따지 않은 빨간 사과들이 대롱대롱 촘촘이 달려있는 나무들을 보니 어린아이처럼 달려가서 나무타고 올라가 따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네 떠나기 전 사과 한보따리는 살 계획이었지만 길가에 죽 늘어선 사과판매대가 끝이 없어 급한 마음은 없었어요


부석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올라가는데 바로 앞에 빨래바구니마냥 큰 플라스틱 바구니 한가득 담아놓은 사과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다른 곳은 그래도 파는 자리가 세팅되어 있어서 천막도 있고 나무판자로 매대로 만들어져 있어서 가건물같은 가게의 느낌이었는데 여기는 등이 굽으신 할머님께서 길가에 플라스틱 바구니와 박스만 늘어놓고 팔고 계셨어요 
다른 곳처럼 감홍, 시나노골드, 부사,.. 등 이름표도 없이..
그런데 거기 사람들 몇몇이 사과를 먹어보고 엄청 맛있다면 그 큰 바구니를 통째로 연달아 사가는 모습을 보고 구미가 당겨 발걸음을 돌려 맛이나 보자고 했죠 


할머님이 사과 한쪽씩 넉넉하게 잘라주셔서 생각없이 먹었는데 씹는 순간 남편과 저의 눈에 불꽃이 튀며 감탄을 하고 저는 감탄을 넘어 흥분하기 시작했어요 
이건 내 인생 사과라는 생각과 함께 반드시 사들고 집에 가서 음미하며 먹어야 겠다는… 순간적인 소유욕이 회오리바람처럼 일었어요
그 큰 바구니 가득한 사과가 15000원이라는데 한번더 놀라며 남편에게 돈을 내라고 했는데 지갑 안에 있던 돈은 달랑 7000원 ㅠㅠ 
저도 남편만 믿고 카드만 들고왔고
할머님은 카드나 이체 그런거 없이 그냥 앉은 자리에서 팔면 빈 바구니 들고 귀가하실 스타일
갑자기 제 마음은 급해지고 근처 atm을 찾자!, 주머니를 더 뒤져봐!.. 하며 저는 더 다급해지고 이성을 잃어가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이 근처에 atm은 없다는 주변 상인분 이야기에 저는 절망을 하고 일단 부석사로 농부에게 끌려가는 소처럼 갔어요 


저라는 사람은 사실 먹는거에 관심없고 특히 사과도 한조각 먹으면 땡, 지글지글 한우도 다름 사람들 침고이고 눈 돌아갈 때 저는 시큰둥… 그렇게 잘 먹지도 않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아요 
그리고 돈을 줘도 아무데나 둬서 남편이 어디서 발견하곤 이걸 아직도 안 치웠냐고, 안 썼냐고 물을 정도고, 자연을 워낙 좋아해서 명품, 자동차, 백화점 이런거 아무 관심이 없고 나가서 푸른 하늘에 구름만 봐도 배부르고 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것만 봐도 행복하고 시리고 맑은 공기 들이마시며 나무 냄새만 맡아도 다 필요없다던 사람이었는데… 그게 아니었던거예요 


부석사에 가기 전 미리 공부하며 문화적 가치, 가람배치며 드넓은 소백산을 정원처럼 호방하게 끌어안은 풍광도 잔뜩 기대하고 갔는데..
무얼 봐도 그 할머님의 사과 한쪽이 차지한 자리를 밀쳐내지 못했어요 
노을이 지면서 발아래 태백산맥의 능선이 산수화로 바뀌고 저 묵색의 능선 너머 다른 세상을 상상케하는 멋진 모습이었지만 머리 속 한곁에 제가 놓지 못하는 생각은 ‘어디 돈 구할 데 없을까?’ ‘7000원어치라도 달라고 해볼까’ ‘할머니는 아직 계실까?’등등 온통 사과 생각이었어요 
내려오는 길에 아름다운 계단과 샛노란 은행잎과 불타는 빨간단풍잎이 길을 덮고 띠엄띠엄 서있는 문들을 통과하면 그림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저에게 그 길은 그 사과할머니에게 돌아가는 길일 뿐이었어요 


내려오면서 대부분 철수한 사과집들을 보며 괴로워하고 있는데 한집이 아직 열었길래 그래도 영주 사관데 이거라도 사가자 하고 맛을 봤지만 아까 그 사과의 강렬하고 오묘한 조화를 이룬 환상적인 맛에 반도 못 미쳤어요 
그래도 사과 좋아하시는 부모님들 드린다고 두 박스 사들고 터덜터덜 내려오는데 저 멀리 그 할머님이 빈바구니를 켜켜이 쌓고 자리 청소를 하고 계시는게 눈에 확 들어왔어요 
이건 뭐 사랑하는 연인이면 바글바글 크리스마스 인파 속에서도 눈에 들어온다는 바로 그 줌효과였어요 ㅎㅎ
저는 한번 더 이성을 잃고 남편 지갑에서 꺼낸 7000원을 들고 할머님께 달려갔죠 
아직 바구니 하나와 작은 봉지 몇개가 남았는데 사정 말씀을 드리니 할머니께서 15000원짜리 바구니에 담긴 사과를 2/3나 담아주셨어요 
괜찮다고 했는데 할머님도 들어가시는 길이라 인심을 팍팍 써주셨어요 


저는 사과봉다리를 손에 쥐고 나서야 이성을 찾았어요 
제가 이런 사람인줄 몰랐어요 
욕심인지 욕망인지 본능인지 모르겠지만 내 안에는 무서운 뭔가가 살아있다는 걸 정신 차리고서야 알았어요 
눈이 홀랑 뒤집힌다는게 뭔지 남편 만났을 때 이후로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나타날 줄이야…
오늘 아침 남편과 아침먹으며 ‘그’ 사과를 잘라놓았는데  둘다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쪽씩 먹었어요 
어제 노을보고 내려오느라 어슴프레해진 시골길을 달리며 ‘여우 출현 주의’라는 표지판을 보고 여긴 여우가 많은가하며 왔는데 어제의 나를 돌아보니 여우에 홀리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50넘은 나이에 뭐든 다 그렇지 뭐..하던 내가 이렇게 순식간에 뭔가에 휩싸여 이성을 잃을 수도 있구나… 제 자신이 다르게 느껴졌어요 
누군가 영주 부석 사과는 어떤 맛이냐고 물으면 ‘여우맛’이라고 대답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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