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죽음과 스쳐 본 적이 있으신가요

비 내리는 십여년전 이맘때였나 싶어요.
유치원에 다니는 큰 아들 준비물(아마도 할로윈 뭐시기)을 사러 집 앞 사거리 건너 다이소에 가던 길이었죠.
저는 까만색 장우산을 쓰고 있었는데 마침 빗줄기가 맞바람을 타고 거의 수평에 가깝게 거세어지는 찰나였어요. 보행자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어서 우산을 앞으로 깊숙히 숙여 쓰고 길을 건너는데 중간쯤 못미쳐 갔을까 끼기기기긱 소리가 나길래 반사적으로 우산을 홱 치켜들었어요. 그랬더니 정말 마술처럼 진짜 코앞에 오토바이가 서 있더라구요. 큰 사거리였고 신호 체계상 좌회전 신호 끝나고 직진으로 바뀌었는데도 무시하고 좌회전을 꺾었고 저를 칠 뻔 한거죠. 검정색 헬멧을 쓴 아저씨가 어이쿠 미안해요! 라고 내뱉더니 그냥 바로 쏜살같이 가버리더라고요.
너무너무 순식간의 일이라 비명조차 안나오고 그 아저씨가 제앞을 지나쳐 간 후에야 어머!!!미쳤나봐!!! 아저씨이!!!!!
이게 제가 한 말의 전부였어요.
번호판도 보지 못했고 정말 그냥 새까만 오토바이 새까만 옷 새까만 헬멧 어이쿠 미안해요 이것밖에 기억에 남는 것이 없었어요.
근데...제가 죽을 뻔(혹은 크게 다칠 뻔) 했잖아요.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순간 떠오르는건 날씨만큼 스산한 집구석 꼬라지..
오늘 마침 구몬선생님 오시는 날인데 엉망이 되어있는 빨래 널려있는 거실 풍경과.. 아무것도 모르고 뽀로로 영상 보면서 까까사러간다고 한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양털조끼에 무릎나온 내복입고있는 꾀죄죄한 둘째..
이 상태로 병원 실려가면 온 사람들이 다 보게 될 나의 궁둥짝 날강날강한 팬티와 짝 안맞는 보풀난 브래지어 ...
정말 생각만 해도 어질어질하더라구요. 그 상황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내가 50센티만 앞서 걸었더라면 닥쳤을 내 아찔한 운명이 조상신이 도왔다고밖에 느낄 수가 없었어요.
집에 오자마자 낡은 속옷들을 다 벗어서 쓰레기봉투에 처넣었죠. 그리고도 한동안은 뭔가 허무하고 알수없고 현재 아무 일 없이 사지육신 멀쩡한 내 자신에 감사하기도 한 복잡한 심정으로 살았던 것 같아요 ㅎㅎㅎ 그리고 역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죠 어느새 또 날강날강한 팬티에 짝 안맞는 브래지어를 차고 살고있는 어제가 오늘같은 평화로운 나날들~~~~
그런데 요새 말많은 이찬혁 신곡을 듣다 보니 그 잊고 지냈던 십여년 전 기억이 문득 떠오르네요. 이젠 살림도 더 불고 까발리자면 더 챙피한 것도 많이 늘었는데.. 삶의 마지막을 앞두고 '이렇게 죽을수는 없어 버킷리스트 다해봐야해' 라는 가사를 보니 남겨둔 버킷리스트 보다 집에 남겨둔 뭔가 챙피한 물건들과 찌질한 삶의 흔적들을 까발려야 하는 상황이 다시금 그 십여년전의 아찔했던 기억들과 함께 스믈스믈 떠오르네요. 어떻게 사는게 잘 사는 걸까요? 살면서 못 해본 버킷리스트 보다 제가 떠나고 난 자리, 찌질한 저의 뒷모습을 마주할 지인들의 정신건강과 저의 마지막 존엄성을 위해 전 다시 낡은 속옷을 버리러 가야 할 것 같네요. (바이럴은 아니지만 이찬혁군의 신곡 너무 중독성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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