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가끔 돌아보면 힘들었던 그 언젠가가 떠올라요.

우리언니에게 제일 힘들었던건,
가난한 8남매의 장남에게 21살때 시집가서
호된 시집살이와, 어린 시동생들의 뒤치닥꺼리에
여념이 없었다고.

12살의 저와 동갑이었던 시동생은
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복도에서 마주치길 잘했고
중학교때에도 등하교길에 종종 마주쳤는데
이런저런 사고때문에 언니가
갓난아기를 안고 자주 나타났어요.

아빠의 술주정과, 엄마가 늘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돈을 벌어야 했던
그 가난을 벗어나려고
무조건 좋다고 하는 사람에게 시집간건데
가보니,
언니네 시아버지도
우리 아빠랑 똑같은분이셨어요.

8명이나 되는 시동생들은
성장과정내내 계속 나이에 맞는
사고를 쳐서 안그래도 가난한 살림에
bmw외제차값을 물어주기도하고
그렇게 크고작은 사고를 감당하는동안
그중 유구한 세월속에 두명의 시동생이 언니네 집에서
기거하며 오십나이로, 결혼도 못하고
암으로 세상을 떴어요.

그런데 엊그제
호랑이같이 매서웠던
언니네 시어머니가
암이래요.
아직은 이 사실을 언니네 시어머니는
모르고 그냥 위염으로 알고만 있다는데

언니가,
제일 힘들었던게
마당의 빨래줄에 걸쳐진 바지들이
색깔별대로, 길이순서대로
널려지지 않으면, 그중에 거슬리는 것 하나때문에
손빨래한 그 그 바지들이 
빨랫집게들과 함께 여기저기 허공으로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면서
진흙범벅이 되어 마당에 나뒹글고
그걸 일일히 씩씩대면서
비누칠을 다 해놓고
그냥 물담긴 다라속에
다 넣어버린 시어머니가 
생각난대요.

늘 애비밥좀 잘해주라고,
없는 살림에,
들볶고,
시동생들은 여전히, 찾아와
밥달라고 하는데
그게 밥때되면 아무때나 찾아와
밥차려달라고 했던 그 어린 시절때부터
굳어왔던 습관때문인것같아요.

형부는 성정이 참 무섭습니다.
이해심도 부족하고,
제가 여상을 다닐떄 몇번의 취업추천에서
몇번을 떨어지다가 드디어 졸업하고
백수로 지낼때
제게 먹대학생이라고 볼때마다 놀렸던
형부.
가난한 우리집의 생계였던 식당을
도우면서 한번도 용돈을 받지못하고
밥만 먹었던 그 시절,
슬펐는데 형부는 그런 저를
먹대학생이라고 놀렸어요.
전 형부의 맘을 알고있었어요.
저 빈정대는 심리는 진심이라는거.
그런 사람이었거든요.

그런 형부는 언니네 식구들이
전부 무서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언니는 지금도 그런 형부를 무서워합니다.
그런 언니는
시동생을 둘이나 뒷바라지해서
장례보내고,
이젠 시어머니의 암앞에서
눈앞에 
선연히 부서지는 여러 색깔의빨래집게와
함부로 나뒹구는 진흙투성이 바지들을 
그 북받치는 마음으로 보고있어요.
저는 그 이야기를 몇번을 들으면서
같이 가슴아파합니다.

저도 그런 가슴아픈 뒤안길이
있는데 언니이야기를 하다보니
못썼네요. 
커피한잔 하면서 잠시 이 계절에
앉아있으니, 지나간 그 힘든 시절이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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