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오백원과 우리집

여상졸업전, 취업은 되어야 했는데
여름방학무렵에 실습나간 제약회사에서도
취업으로 이어지지않고, 두차례 더 취업추천의 기회도 번번이
미끄러져서
결국 졸업식 전날까지
교실에 남아있게 되었는데
그땐 대학진학하려는 친구들.
혹은 취업추천의 기회가 한번도 안오거나 저처럼
늘 낙방한 친구들.만 남아있게되었어요.

매일 학교에선 비디오만 보던 학교생활도 끝나고
그해는 마냥놀고 지낼수가 없어
식당을 하던 우리집을 거들었어요.

늘 깔끔하던 엄마아빠덕분에
의자다리랑, 미닫이창호지문살틈도
다 닦고 늘 홀과 손님용방을 밀고닦고
설거지하면서 하루를 보냈어요.

손님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어느정도 손님이 없는 오후 2시무렵엔
정보처리기능사 자격증을 따러
학원을 가야 했어요
그당시 버스요금은 180원이었고
늘 500원을 꺼내갔는데

엄마가 한다는 말이 아빠가 싫어하니
금고에 손대지말라고 화를 냈어요.
제가 식당일을 도와주고 받는 금액은
하나도 없는데
그 오백원조차 안된다는거에요.
학원비는,
그당시, 국비로 진행했던  6개월과정을 들었던거니까
사실, 책값도  패키지로 포함되어있던 거라,
돈은 하나도 안들었던 건데
오고가는 학원비가 문제였어요.

생각끝에
식당일을 도와줄순없고
근처 분식집에서 알바를 하면서
교통비나 점심값을 충당하면서
6개월간을 자격증공부를 했는데

동전 단하나.
오백원때문에
식당을 하는 우리집이 아닌
다른 분식집에서
알바를 할수밖에 없던 근원적인
이유가 저를 정말 비참하게 했어요.

우리 부모는 어떤 사람인지 
폐부깊숙히 깨닫게 한 사람이니까요.

가끔, 머릿속에 들어오지않는
c++. 프로그래밍언어등등
두꺼운 책들너머로

또 제게
먹대학생이라고 졸업과 동시에
놀려댔던 형부가 생각나고
금고에서 오백원을 못가져가게했던
우리 엄마아빠가 생각나는
현실이
그게 제 20살이라는게
너무 싫었어요.

자격증시험에 최종 붙었을때
학원에서 연계해준 회사는
기차타고 갈만큼 멀었는데
기숙사도 있고 대기업이어서
지체없이 떠났어요.

그곳에서 첫월급을 받고
엄마아빠 내복도 사주고.
통장에 돈도 쌓이고,
게다가
직속상관인 부장님은
절 또 다정하게 챙겨주어서
편안히 잘 다닐수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돈이 모이지않았어요.
아빠가 원래 돈에 대해선 헤프고
저렇게 일하다가도
술이 땡기면 국자도 내던진채
그날부터 매일 술을 마셨어요.
그리고 그때부턴 동네를 휘젓고 다니고
바지가랑이가 오물에 젖은채
집에 와서 의처증이 도져
엄마머리채 그대로 벽에 박고
식당일로 번돈은 완전히 다 없어질때까지
써야 했어요.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제 직장생활 2년째 되었을때
가세는 이미 기울고
집도 마련하지 못한채
평생을 월세로만 살다가 쫒겨나길 반복했는데
이번엔 아빠가 중풍과 암이 와서
그나마 식당도 운영못하는 사이
그 월세도 밀리고
식당에 딸린 방에선 어느날
나올줄 알았는데
이젠 나올 희망이 없더라구요.
우리도 학창시절을 그 방에서
지냈으니 그 짜증을 알죠.


그전에 이미 제돈은
집에서 다 쓰고 없었어요.
저도 우리집도 누구나 전부
돈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아빠는 중풍과 암이 깊어져
결국엔 평생 집한칸 소유해보지도 못하고
집주인의 월세독촉전화에 시달리는 생활을
마감했어요.

오백원도 자식의 손에 쥐어준다는게
아까웠던 사람.
그런 사람이
너, 이세상에 그 추운겨울에 태어났을땐
진정 온몸으로 너를 안고 
기뻐하면서 옥이야 금이야 키웠다.

그런 큰 기쁨을 안겨준 아기의 스무살이
오백원도 늘 주기 아까웠을까.
늘 날 볼때마다
먹대학생이라고 놀리던 형부를 보면서
이제 시작된 나의 스무살은 또 얼마나 암담했는지

게다가 공부를 할수록
난해했던 c언어, c++을 뽈뽈이라고
읽으면서 책상에 앉아 멍해있던 나의 스무살.

그 스무살이
이제 내년이면 우리 큰애도 대학생이 될텐데
어떤 행보로 다가올지, 혹여나 저처럼
힘든 스무살이면 어떡하지 싶어요

지나고 나니, 그 스무살은
인생에서 제일 꽃같고 아름다웠던 시기였는데.
그시절엔 그걸 몰랐고
지금은 알것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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